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깥 Feb 17. 2017

Tragedy and the Common Man

트레바리 극극 1702 <세일즈맨의 죽음> by 아서 밀러

생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죽음은 심리적 거리가 매우 멀게 느껴지는 현상이다. 죽음을 맞이할 수는 있어도 그 경험을 기억할 수는 없으며, 부정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부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도처에서 관찰된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사고와 자살 소식을 보고 듣는다. 개념적으로 죽음을 정의할 수는 있을지라도 인물, 상황 등 여러 요인으로 둘러싸인 현상으로서의 죽음은 매우 다양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고귀한 생명의 불씨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음은 어느 정도의 엄숙함과 비극성을 내포한다. 특히나 자살의 형태로 죽음이 이루어졌다면 비극성은 가중된다.


또한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귀결된다. 서양의 장례 문화를 보면 고인의 지인들이 생전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잃어버린 물건은 그 가치가 크게 느껴지는 법이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그 빈자리를 느낀다는 시 구절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윌리 로먼은 죽음을 맞이한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윌리의 죽음에서도 비극성과 존재의 문제는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죽음에 이르기 직전, 윌리가 정원에 씨앗을 심고 비프와 마지막 갈등을 겪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작품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분석해본다면 윌리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The Common Man, Willy Loman

윌리 로먼은 세일즈맨이다. 63세라는 나이에 여전히 먼 길로 외판을 다녀야 하는 그는 엄청난 피곤함을 호소한다.

피곤해 죽을 지경이야. (p.11)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36년째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각종 수리비와 할부금을 갚기에 급급하다. 그의 직업인 세일즈맨은 미국의 개척 시기, 그리고 상업자본주의 성장기에 있어서 핵심 경제주체였다. 새로운 판매 경로를 개척하고, 미국 곳곳을 다니며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대공황의 여파는 세일즈맨에게도 찾아왔다. 수요가 줄어 생산도 줄어들고 이는 실업의 증가로 연결되어 다시 수요가 감소하는 악순환 속에서 세일즈맨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었다. 더불어 발전된 대중광고로 인해 세일즈맨의 위상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있는 아들 둘마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비프는 번번한 직장을 갖지 못한 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고, 해피는 린다의 표현에 의하면 '바람둥이 놈팡이'(p.66)다.


평소와 같이 외근을 나갔던 윌리가 그날 밤 갑자기 집에 돌아오면서 극은 시작된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얼마 전부터 이상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윌리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게 찾아오는 환상은 운전을 해야 하는 그에게 큰 위험요소다. 그의 환상은 과거의 한 시점에 고정된다. 그 시점은 1928년으로 윌리의 전성기이자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다. 대공황 직전이었던 그때, 주당 커미션만 170달러를 넘는 등 그는 세일즈맨으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첫째 아들 비프 역시 촉망받던 미식축구 선수로서 대학 세 군데서 장학금 제안을 받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에게는 가장 좋았던 시절이다.

언제나 어떤 즐거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고 뭔가 좋은 일이 앞에 있었어요. (p.154)

윌리의 개별적 특성을 제외한다면 그가 살아온 과정은 크게 특별하지 않다. 젊은 시절 전성기를 보내고 부침을 겪으며 나이가 드는, 언제나 먹고 살 걱정, 자식 걱정을 하는 한 가장의 모습이다. 윌리는 전형적인 현대 소시민이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p.64)

그런 그가 자살을 택한다. 만족스러운 삶은 아닐지라도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았다. 노년기에 접어들고 자녀가 있는 그 누가 겪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살을 함으로써 얻으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Death of a Salesman

  아서 밀러는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에세이 <Tragedy and the Common Man>에서 비극은 사회에서의 정당한 지위를 얻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서술하였다.

As a general rule, to which there may be exceptions unknown to me, I think the tragic feeling is evoked in us when we are in the presence of a character who is ready to lay down his life, if need be, to secure one thing - his sense of personal dignity. From Orestes to Hamlet, Medea to Macbeth, the underlying struggle is that of the individual attempting to gain his "rightful" position in his society.

rightful position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 위치에서 버려지거나 대체된다는 것은 존재의 가치가 부정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밀러는 '보통사람'이 이러한 두려움을 가장 잘 안다고 보았다.

The quality in such plays that does shake us, however, derives from the underlying fear of being displaced, the disaster inherent in being torn away from our chosen image of what and who we are in this world. Among us today this fear is as strongm and perhaps stronger, than it ever was. In fact, it is the common man who knows this fear best.

이 설명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윌리 로먼이다. 대공황이 찾아온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은 윌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되는 삶의 연속이었다. 늙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윌리가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그가 사회적 존재로서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직장 상사 하워드에게 윌리는 외판을 할 능력 정도밖에 안되면서(하지만 이건 비즈니스니까 누가 됐든 자기 능력대로 일을 맡아야 한단 말이지요. : p.94) 고작 자동차 사고만 내는(또 사고 낸 건 아니겠죠? : p.93) 골칫거리에 불과하다. 아무리 윌리가 하워드 부친과의 관계를 이야기해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비즈니스는 비즈니스지요. 인정해야 해요. : p.95). 가정에서의 존재도 위협받고 있다. 열심히 일했지만 정작 가족들에게 남겨줄 재산은 없다(찰리, 난 그애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어. 빈털터리, 빈털터리야. : p.48). 자식을 어떻게 키웠는지는 가장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나 윌리는 아버지의 부재로 더욱 이 점에 대해 강박을 가지고 있다(내가 어떻게 가르쳤는데? 살면서 지금껏 제대로 안 가르친 적이 없었어! : p.46, 어떤 때는 제가 애들을 잘못 가르치는 게 아닌가 두렵거든요. 형님, 애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 p.58). 이러한 윌리에게 기대대로 자라지 못한 비프와 해피의 모습은 곧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치가 부정되는 것이다.


윌리는 존재의 가치를 되찾으려고 한다. 윌리가 이 목적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시계는 1928년 전성기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그가 과거의 환상에 갇힌 이유다. 자살을 결심하고 기뻐했던 부분 중 하나도 과거처럼 비프가 버나드보다 다시 앞서갈 거라는 점이다(보험사에서 우편이 오면 다시 버나드보다 앞서 가게 될 거예요! : p.165) 존재 가치에 대한 집착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어디를 가나 알아봐 주기를 원한다. 심지어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여성이 "내가 당신을 고른거지(p.43)"라고 하자 기뻐한다.


존재의 가치를 찾기 위한 윌리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아니, 자살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월급도 받지 못하고 있는 그의 가치는 앞으로 더욱 떨어질 것이고 그마저도 해고된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동안에 일한 가치를 인정받는 방법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봉급을 쪼개 꼬박꼬박 지불했던 보험이다(꼬박꼬박 보험료 내느라고 노새처럼 일했단 말입니다. : p.152) 2만 달러나 되는 보험금을 가족에게 남기면서 가장으로서의 가치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준비한다. 씨앗을 심는 행위는 이에 근거하여 해석할 수 있다. 과거 그의 집 정원에는 라일락과 등나무, 수선화가 자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여보, 점점 더 옛날 생각을 하게 되는군. 이맘때쯤이면 라일락과 등나무가 한창이었지. 그다음엔 작약이고, 그러고 나면 수선화지. 이 방에 향기가 가득했는데! (p.17)

이제는 주위에 들어선 아파트로 인해 삭막해진 집을 과거에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씨앗을 심는다. 겉모양만이라도 최대한 좋았던 시절처럼 만들려는 것이다. 모든 좋은 일이 일어났던 그 시절의 터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자살하기 직전 할 수 있는 준비 과정으로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작품의 구조적 측면에서도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하다. 작품이 실제적으로 진행되는 외적 플롯의 시간은 하루다. 그러나 내적 플롯으로서 윌리의 의식 속에서 흐르는 시간은 30년을 넘나 든다. 윌리가 느낀 시간은 똑같은 하루가 아니라 길고도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여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과정이 이 장면에 담겨 있다.


열심히 마지막을 준비하는 윌리에게도 단 하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자신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확실할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죽음은 2만 달러를 다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이다.

벤 : (정원 가장자리로 오며) 그 애는 널 겁쟁이라고 할걸.
윌리 : (갑자기 두려워져서) 안 돼요, 그건 끔찍한 일이에요.
벤 : 그럼. 지독하게 바보 같은 짓이기도 하지.
윌리 : 안 돼요, 그래선 안 돼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좌절하여 절망감에 휩싸인다.)
벤 : 윌리엄, 그 애는 너를 미워할 거야. (pp.153-154)

이는 그가 동경했던 데이브 싱글먼이 맞이한 세일즈맨다운 죽음이 아니다. 그동안 윌리가 여러 번의 자살 시도에만 그쳤던 이유도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마지막으로 비프와 갈등을 겪으면서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한참 있다가 놀라고 들떠서) 놀랍지...... 않아? 비프가...... 나를 좋아해! (중략)
나를 사랑해. (벅차서) 항상 사랑했어. 굉장한 일 아니야? 형님, 제가 한 일을 칭송하게 될 거예요! (pp.162-164)

아버지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비프의 모습에 윌리는 감동받는다. 자신을 이토록 생각하고 있는 아들이라면 자신의 죽음도 가치 있게 생각할 것임을 확신한다. 그의 마지막 고뇌가 사라지는 순간, 그는 모든 준비가 끝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느낀다. 그리고는 차에 오른다.


Tragedy and the Common Man

윌리 로먼이 원했던 바는 무너졌던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되찾는 것이었다. 가정 및 사회에서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그가 택할 수 있었던 행동은 자살이었다. 고액의 보험금을 남기면서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가족이 인정해주는 것만큼 최선은 없었기 때문이다. 씨앗을 심으면서 마지막을 준비하지만 후자에 대한 확신이 없어 그는 고뇌한다. 결국 비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고, 그는 행동으로 옮긴다.


아서 밀러는 비극의 유용성을 강조하면서 극 중 인물이 정당한 지위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전달되는 페이소스를 중요시한다. 이 작품에서도 윌리 로먼이 잃었던 존재 가치를 되찾기 위해 자살을 택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이 페이소스를 느끼기를 의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퀴엠에서 의문이 든다. 레퀴엠에서 그려진 윌리의 장례식은 그가 확신을 가졌던 모습이 아니다. 조문객은 그의 가족과 찰리뿐이다. 자신의 죽음을 가치 있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던 아들 비프는 오히려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윌리가 바랐던 꿈과 현실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이는 페이소스가 아니라 일말의 허무함을 주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허무함 말이다.


윌리의 모습과 현재 우리의 모습을 겹쳐서 바라보면 거의 흡사하다. 존재의 가치를 얻기 위해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도구로 사용한 윌리의 선택은 불편함을 준다. 반성하건대 원하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우리의 모습 역시 불편하다. 존재의 가치를 위해 존재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이 굴레 속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존재의 무거움을 나누어 짊어질 수 있는 서로 간의 작은 관심은 아닐까? 린다의 대사가 머리에 맴도는 이유다.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p.64)


#What We're Reading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7462184

#트레바리

http://trevari.co.k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이 바뀌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