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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un 08. 2021

엄마의 노동, 그리고 은퇴.

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 엄마는 일을 시작하셨다.

친구들에게 엄마와의 일화를 공유하기를 좋아한다. 다정하고 친구같은 엄마를 자랑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엄마 특유의 나긋나긋 친절한 목소리로 라이브 악플을 달아주는 엄마의 성대모사를 제일 자주 했던 것 같다. ("너희 언니는 예쁘지만 매력이 없고, 너는 예쁘진 않지만 매력은 있어.")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엄마에게 친근감을 느껴하곤 했다. "우리 예쁜 막내딸, 어떻게 시집을 보내니."라며 결혼식 전날 내 손을 잡던 엄마를 성대모사할 때는 엄마의 따뜻함에 눈물을 글썽인 친구조차 있었다.

나는 그런 친구들에게도 엄마의 노동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엄마가 엄마의 유머감각, 아름다운 미모, 우아함으로만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원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엄마가 그 작고 연약한 몸으로 주말도 없는 일, 손님이라는 이유로 시시각각 갑질을 해대는 이방인들을 상대하는 일, 하루 10시간을 꼿꼿이 서있어야 하는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기 너무 아팠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 엄마는 일을 시작하셨다. 사업이라는 것이 늘 예측불허인지라 아빠의 어깨에 짐을 덜어주고자 일터로 나가셨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수줍은 공부쟁이에 이상을 꿈꾸는 기질을 타고난 나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몇 번 하지 않았고, 돈버는 성인이 되어 효도하기가 무섭게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성실하게 우리의 생계를 지탱해주는 엄마 밑에서 공부쟁이 딸로 지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엄마의 세월 앞에서 '번아웃'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사치같아 최근 나의 휴직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엄마는 다양한 곳에서 일을 했다. 호프집, 호두파이 베이커리, 해외 명품 그릇 가게, 백화점 판촉행사, 병원 내 건강보조기구 판매. 검은 유니폼 위에 새우튀김 기름이 튀거나, 계산대 옆구리에 마련된 작은 판촉대 구석에 서있을 때에도 엄마는 미소와 꼿꼿함을 잃지 않으셨다. 아르바이트는 결국 생계의 수단인지라 절박한 마음으로 일한다고 말하지만, 엄마는 일터에서 얻는 인연과 배움을 엄마의 삶에 힘껏 받아들이고 예쁘게 피웠다. 그 어떤 직업인 못지 않게 맡은 일을 면밀히 공부했고 판매하는 제품을 정말로 믿고 좋아했다. 호두파이를 팔 때는 수능 공부하는 딸의 야식으로 팔고 남은 호두파이를 가져 오셨고, 찜질팩을 팔 때는 언니나 내가 몸이 어디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그 부위에 딱 맞는 찜질팩을 선물하려고 하셨다. 해외 명품 그릇을 판매할 때는 미국에 있는 딸을 보러 놀러 와서도 백화점을 찾아 마켓리서치를 하듯 한참 동안 그릇브랜드 매장을 돌아다니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루머와 시기가 가득하기 마련인 임시직 일터에서 평생 친구들을 만들었고, 심지어 결혼을 성사시켜준 커플도 있었다. 출산을 앞둔 손님이나 외국인과 다정히 손을 잡고 찾아온 손님에게서 딸들의 모습을 그렸고 그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장사가 잘 되지 않는 날이면 사장님의 마음으로 불편해했고, 손님처럼 물건을 사온 적도 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 일터에서든 엄마는 최고 연장자가 되어 있었다. 직장이었다면 '라떼이즈홀스'를 남발하는 꼰대상사가 되었어도 다들 인정했을 법한 연륜인데, 엄마는 요즘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을 불편해 한다며 훈장처럼 하얘져가는 머리와 손위에 잡힌 주름을 수줍게 가리곤 했다. 그래도 엄마와 함께 일한 경력이 있는 동료들은 주변에 일자리가 생길때마다 꼭 연락을 해오셨다.



엄마가 지난 달 수줍게 말했다. 일하던 지점이 폐쇄됨과 동시에 마침내 엄마의 일도 끝이 나게 되었다고. 훗날 손주가 생기면 그만두겠노라고 계속 은퇴 날짜를 미뤄오던 엄마였다. 막상 손자가 생기고 난 뒤에는 손자 용돈이라도 벌고 싶다며 출근을 이어왔다. 딸들도 설득하지 못한 엄마의 은퇴를 코로나가 해낸 것이다.


아르바이트 인생이라 은퇴식도, 퇴직금도 주어지지 않아 아쉽다며 엄마는 볼을 붉히셨다. 지난 15년 내내 빨리 일을 그만두라고 잔소리만 해대느라 바빠서, 엄마의 노동현장도 엄마 삶의 중요한 조각이자 정체성의 일부였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것은 한때는 생계의 동아줄이었고, 한때는 자식을 장성히 키워낸 어머니가 느끼는 허전함을 채워주는 에너지의 공간이었으며, 한때는 가족과 친구보다 더 큰 사회를 만날 수 있는 여행지였고, 한때는 나이들어감의 무력함을 상쇄시켜주는 커뮤니티였다.


일을 그만둔 엄마는 이제 막내 사위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목표로 영어공부에 한창이고, 사람들과 즐거운 대화를 하기 위해 썰렁유머를 섭렵중이시다. 삶의 거침을 몸소 부데끼며 살아왔을 지언정 마음 속 깊숙히에 있는 순수함을 오랫동안 지켜온 엄마를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가 되고나서야, 성공한 직업인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고나서야, 비로소 엄마를, 엄마의 노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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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Image: Mother and DaughterEgon Schiele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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