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힘들 때, 외롭고 힘든 순간에, 그 순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앞으로의 삶은 모르기에, 이에 대한 공포가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걱정인 것은 안다. 하지만 두려운 것을 어찌하겠는가. 기쁨은 두 번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는 손님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스타를 통해 타인이 사는 모습을 볼 때 이 같은 감정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SNS가 사람을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이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요즘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순간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기쁨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기쁨이 있다는 것을. 예전이었으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삶이 힘들 때 《금강경》을 읽은 적이 있다. 대승불교의 대표 경전으로 알려진 금강경은 생각보다 나에게 많은 통찰을 안겨주었다. 그 책은 공(空) 사상을 얘기한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란 없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책을 넘기고 이에 대해 깊이 알게 되면서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평온함을 느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힘든 감정을 흘려보내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데 큰 힘을 얻었다고 해야 되나.
당시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혹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외롭다고 혹은 앞으로 외로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이 차갑다고 혹은 앞으로 더 차가운 세상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둡고 힘든 것들에 나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의 두려움 때문에 두려움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알겠다. 행복이니 불행이니, 따뜻함이니 차가움이니 이 모든 것은 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행복과 불행, 외로움과 소속감, 차가움과 따뜻함, 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차갑게 느껴지는 -100도의 온도는 -200도 보다 더 따뜻하다. -200도는 절대영도 보다 더 따듯하다. 그리고 절대영도는 모든 따뜻함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100도는 시선을 어디에 집중하는지에 따라 굉장히 차가운 온도가 될 수도 따듯한 온도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의 힘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자 한 가지 용기 있는 결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환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 상황이 와도 괜찮다고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기까지 했다. 나에게 느껴지는 온갖 감정을 흘려보내며 말이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그렇게 감정을 흘려보내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되더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순간이 벌어져도 바람은 시원한 계속 분다. 비가 오는 날도 있을 것이고, 맑은 날도 있을 것이다. 느껴지는 공기, 몸에서 느껴지는 온도, 그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최악이 벌어져도 그런 순간을 아주 잠깐 1초라도 맛볼 수만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두려움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행복을 추구해서 그렇다는 것을.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에 반대되는 결과가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고통을 추구한다면 어떨까. 그것으로 두려워할 일이 없다. 물론 그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이 경험이 나에게 이 같은 생각을 하게 한 큰 이유가 되었다. 행복이 아닌 고통을 바라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큰 자유를 준다는 것을. 그리고 알게 되었다. 행복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불행과 행복은 왼쪽과 오른쪽과 같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와 +로 표현이 되듯이.
결국 모든 것을 기쁨으로 보고 따뜻함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심리학에서는 더 이상 행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보다 확장된 단어인 웰빙(Well-be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어떤 상황이든 있는 그대로 조건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웰빙이다. 고대힌두교, 불교전통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존재한다. 우리 모두는 근원적으로 우주와 하나이고, 그것에서 오는 따뜻함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음수인 마이너스의 숫자들이 무한하듯이. 이것이 힌두교의 아트만(Atman), 불교의 자비(慈悲) 개념의 기본 전재이다. 이처럼 나는 내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것이 아무리 다크초콜릿처럼 텁텁한 맛이 느껴지는 사건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순간에 희망이 있다고. 기쁨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기쁨이 있다고. 예전이었으면 헛소리로 치부했을만한 말을, 지금은 그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