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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엘 Nael Oct 06. 2024

나에게 엄격하지 않기로 했다 2

감정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않기


얼마 전 공원길을 걷다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을손으로 잡았다. 그렇게 가을은 바람을 타고 내게 들어와, 조용히 인사했다.


종종 학원에 가기 싫다며 수업을 빼먹는 둘째 아이에게 드디어 호되게 야단을 쳤다. 큰아이는 중1까지 우리 부부가 직접 가르쳤지만, 둘째는 그럴 여력이 없다. 이미 방전된 체력과 나의 일로도 포화 상태여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사실, 아이는 여러 차례 학원 문제를 호소했고, 어렵지도 않은 학습을 굳이 학원에서 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학교에서도 배우는 것을 학원에서 배울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될 학습이 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이는 집에 돌아오면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 시청을 즐긴다. 남편과 시간을 정했다는데, 내 눈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스마트 기기에 의존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그리고 집에서 학습하고 싶다고 했지만, 자기주도학습의 마무리는 결국 부모의 몫이다. 아이가 어느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도와주어야 하는지 전반적인 평가와 지도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문제 해결을 떠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지치는 작업이다. 그래서 둘째에게 늘 미안하다. 더 넉넉한 환경과 시간, 그리고 물질적으로 안정된 생활이라면 이런 부분이 크게 힘들게 다가오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다.


처음엔 아파서 학원을 빠지고, 다음엔 힘들다는 이유로 빠지고, 또 학교 동아리 모임으로 빠지더니, 결국엔 별다른 이유 없이 단지 가기 싫어서 빠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주말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주중에 하지 못했던 컴퓨터를 실컷 하기 시작했다. 학원에서는 그동안 빠진 공부를 보충해 주기 위해 이번 주말에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아이는 오늘도 개인적인 만족을 채우기 위해 약속을 미뤘다.


나의 가치관과 신념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되지 않아 결국 감정적으로 폭발해 버렸다. 아이는 마지못해 책을 챙겨 학원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아침도 먹지 않고 나간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늦은 아침을 준비해 놓고 돌아오면 바로 먹이려고 했지만, 공부를 마치고도 집에 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일에 집중해보려 했지만 아이가 걱정되었다.


늦은 오후에 겨우 연락이 닿은 아이는 마당이 넓은 부자 친구 집에서 놀고 있었다.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하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집과 제법 거리가 있어 데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아이는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말하며 계속 친구 집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었지만, 집에서는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늦었으니 아이를 데리고 오라는 내 말이 유난스럽다며 남편이 들어주지 않아서 서운했다. 며칠 전 휴일에는 아무 말 없이 시댁에 가서 종일 머물다 오고, 주말엔 자격시험 준비로 도서관에서 온종일 보내다가 들어왔다.


둘째의 담임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이다. 학급 밴드에 아이들의 활동 사진을 올리고, 현장 학습 때면 아이들을 향한 배려와 세심한 손길이 그대로 전해졌다. 선생님의 자녀도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선생님 아빠의 자녀 교육이 눈에 띄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결혼에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것을.

나이 많아 무던해 보이던 사람이 지금은 가족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고, 나이의 느긋함이 이제는 체력 부족으로 아이들을 케어하지 않는 방관처럼 보여 속상했다.

물론, 남편도 가족을 위해 먹고살기 위한 생존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자녀에게 너무 관대했다. 잘 챙겨주지 못하는 아이에게 다니기 싫은 학원에 보내는 게 마음에 불편해서 '쉬었다 하렴'이라는 생각이 아이의 의지를 흐릿하게 만든 것 같다. 자녀 교육은 참으로 쉽지 않다. 큰아이에게는 나도 엄마는 처음이라서 라는 핑계를 댔고, 둘째에게는 큰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다 보니 성향이 다른 아이에게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과 학업을 병행 후 1년 가까이 가족과 나의 감정 요구사항을 미뤄두었다. 결국, 내 안에 쌓인 감정이 '뿔난 도깨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집안을 휘저었다. 나 자신도 놀랐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하, 제대로 미쳤구나!"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내 안의 불편한 감정을 방치한 채 품위를 유지했고, 집 안에서는 믿음 안에서 자유와 평화가 공존하는 가정이라고 착각하며 방관했던 내 모습에 화가 난 것이다.

그래서 가족 모두에게 미안함이 역으로 표출되었고, 왜 각자의 할 일을 미뤄두고 내 마음이 이렇게 망가지게 하느냐고 하소연하듯 소리치며 본질을 흐리게 했다.

사실 아이에게 행동 수정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오늘의 이 감정이 오롯이 아이의 행동에만 속상하고 화가 난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일과 학업에 대한 열정이 소진되어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이고, 그로 인해 1년 반 이상 공들인 95%의 또 다른 완성물을 두고 포기했다. 아니, 물러났다.

긴 시간 버텼던 문제를 조금 더 버티지 않았다는 것이 나를 심하게 짓눌렀다.

그 후로 나는 이전보다 더욱 내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멈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 자신에게 실망한 것이다.


함께 시작했던 현직 보건교사인 선배는 진작에 무리였다며 미련 갖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했지만, 나는 혼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많은 희생을 했고, 나의 도전이었기에 마무리 짓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역한 환경에서도 꾹 참으며 나를 밀어붙였다.


나는 언제부턴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내게 맞는지 맞지 않은지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사유를 넘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념이 가득하기 때문에 더 지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심리적 갈등이 완연한데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 맞는지, 그 이유가 합당한 지, 도피하는 것은 아닌지, 그럴듯한 이유로 나를 포장하고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등의 사념이 중단의 스위치를 누르지 못하게 했다.


지치고 힘들어도 가슴이 뚫린 공허함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나를 인내하게 했다. 그러나 결국 그 끈을 놓았다. 예상대로 지금 나는 공허하다.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다.

왜 이런 선택을 했고, 왜 이런 기분을 느끼도록 만들었는지, 그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그동안 나를 옥죄던 감정 안에도 나름의 만족감과 성취감이 있었지만, 몸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괴로움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했고, 갑작스러운 위경련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다 건강을 잃을 것 같아서, 드디어 욕심이구나라는 판단으로 중단을 선택했다.

그리고 후련한 마음도 잠시, 며칠 후 상실감이란 감정이 찾아왔다. 그래서 아주 지독하게 앓고 있다.

아마도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 쓰레기를 가족들에게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스스로도 참 보기 안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정의 브레이크를 밟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이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맞지만, 그것을 가족이나 약자에게 쏟아내는 것은 참 어리석고 나의 볼품없는 모습을 드러내는 이중고를 겪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갈대 같은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고 없는 감정의 폭풍에 휘청이며 타인에게 독기를 토해내고 있다는 것이 슬펐다.


늦은 시간에 귀가한 아이는 "엄마,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성난 감정을 가라앉히고 싶어 아이와 짧게 이야기를 나눈 후 대화의 문을 닫았다. 사실은 무사히 돌아와 준 것 만으로 감사했다.

다음 날 시무룩한 아이에게 먼저 사과했다. 감정을 쏟아낼 대상이 아이였다는 게 나를 더 부족하게 느끼게 했고, 그로 인해 더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옳은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을 인지하고 다시 노력해 보기로 했다.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이 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서로를 안아주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이 그 안에 흘렀다.

그 순간, 우리는 꽉 눌러 밀폐된 마음의 무게를 조금 덜어낸 듯했다.


그때 비로소 보였다.


아이의 가슴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그리고 나의 뻥 뚫린 가슴이 아이로 채워지고 있음을.


당연하게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사랑을 보았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그 순간, 어제보다 더 성장하려는 오늘을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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