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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석금 May 26. 2020

종이를 접다.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주말이나 휴일은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나에게는 앞으로 맞이할 낯선 시간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기다리고 있듯이 이제부터는 지금껏 바쁘게 달려온 나의 시간들을 돌아볼 계절이 성큼성큼 나를 향해 애달픈 손짓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발라드 리스트를 찾아 켜놓고 세탁기를 돌렸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천둥 치듯 힘찬 소리와 함께 세탁이 시작되었다. 창문 옆 작은 책상 위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노트북을 켜자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비가 오렸는지 하늘은 찌푸린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쯤 열어놓은 유리창 사이로 주변 횟집을 찾는 손님들의 왁자지껄함에 잠시 이마에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그것도 잠시 베란다의 자그마한 화분에 예쁘게 피어있는 붉은 꽃을 바라보니 언제 내 맘이 그랬냐는 듯 웃음이 내게로 찾아왔다.  


어느 날 남편 손에 들린 화분을 쳐다보며 '꽃을 다 사 오고 무슨 꽃이에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겨울에 피는 꽃이라며 꽃 이름을 알려줬는데 갑자기 생각하려니 도통 꽃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혼잣말로 '나도 이젠 나이를 못 속이겠구나.'라며 중얼거리는데 겁이 덜컥 났다. 그동안 퇴직 후의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봤지만 맘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생각을 접고 오랜만에 브런치(brunch)를 클릭하니 새삼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 작가 신청을 하던 날들이 생각났다. 나 자신을 아니 글 쓰는 나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고 있었던 어리석음이 가득한 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란 답을 접하는 순간 하늘색이 노랗게 보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도전했지만 매번 답은 똑같았다.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는데 나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가보다. 


다섯 번 째는 꼭 통과하리란 맘으로 다른 작가들의 도전 성공기를 찾아 읽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정성껏 작성해 신청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의 메일함에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란 브런치팀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메일을 읽는 순간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만큼 그때 느꼈던 기쁨도 그리고 앞으로의 나의 결심도 자꾸 희미해져 갔다. 




문득 '처음처럼'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순간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내가 가장 행복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은 지금처럼 글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 다른 작가들의 글을 찾아 읽으며 다시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휴대폰에서는 다른 노래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세탁기에서는 탈수가 시작되었는지 성난 파도처럼 소리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창밖을 바라보니 한 무리가 회센터로 들어가고 있었다. 노트북 뒤 유리병에 꽂아 놓은 지루할 때나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접었던 무지개 색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랗고 긴 종이를 꺼내  대각선으로 접어 다시 선대로 접자 작은 새알이 만들어졌다. 생산적인 일인데도 이상하게 전혀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내가 신명 나게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글을 써야 된다는 생각이 들자 힘이 나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즐겁고 행복했다. 


엄마 계실 때에 늘 하던 말씀이 있었다.

<우리 막내딸은 시작은 거창한데 끝은 미약해.>라고.......

정말 무엇을 시작할 때는 거창하게 화려하게 준비하지만 중간 정도에 이르면 흐지부지되었기 때문이다.  유리병에 접은 새알 하나를 넣으며 생각해본다. 몸이 늙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생각만큼은 늙지 않게 잘 지켜야겠다고.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 매 순간마다 즐거움을 찾는다면 다가오는 시간들이 결코 지루하거나 헛되지 않으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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