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담쓰담.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그 세찬 바람도 비도 가늘어져 있었다. 이젠 비가 그치려나보다. 그는 다가와 나의 손을 잡고 밝게 웃었다. '그래. 난 지금 행복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잠잠했던 내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의 손을 놓으려 하자 그는 더 세게 잡으며 내 가방을 열고 핸드폰을 꺼내 내 귓가에 대었다. 정민이었다.
"윤설! 너 지금 어디야?"
나는 갑자기 정민을 놀리고 싶은 맘에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여기 바다야."
"바다라고. 정말 바다야?"
"음. 정말 바다야. 안녕."
"야 윤설. 혼자 바다에 갔다고? 똑바로 말 못 해?"
그녀의 외침을 외면하고 통화를 마쳤다. 뒤에서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그가 큰소리로 웃으며 나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와 초밀착되자 가늘게 떨리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헝클며.
"당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내가 본 당신의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어. 앞으로가 기대되는데."
그는 한쪽 눈을 찡긋 윙크를 하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렇게 장난기가 가득한 사람이 바로 나 윤 설이었지'라고.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의 손을 잡아 내 눈앞에 올리며 말했다.
"절대로 이 손 놓지 않을 거야. 당신이 놓으려 해도."
그는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난 걸까. 갑자기 시간을 확인하더니 급히 차에 올랐다. 카페를 나와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돌아보니 마을의 가구 수는 적지만 주변이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 대형 주차장이 있어 주민들이 모두 이곳에 자기 차를 주차시키고 있는 거 같았다. 집집마다 경사가 있어 집들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지붕의 색도 다양해 마치 다른 나라에 와있는 거 같았다. 그는 뒷좌석에 있던 여행용 트렁크를 내렸다. 그리고 나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그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는 오늘 정말 많이 웃었다. 늘 긴장해 있던 모습만 보다 풀어진 그가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가 멈춘 곳은 마을에서도 가장 예쁘고 정원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거처럼 한 부부가 웃으며 뛰어나와 그를 반겼다.
"오랜만이야."
"귀국해서 바로 오려고 했는데 이제야 왔습니다. 잘 지내셨죠?"
"우린 잘 지냈지."
그가 나의 손을 끌어당기며 그들 앞에 세웠다.
"인사해요. 우리 이모와 이모부셔요."
"처음 뵙겠습니다. 윤설입니다."
그들은 그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반가워요. 잘 왔어요.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죠."
그의 이모는 나이가 있는데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딘가에서 본듯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의 이모부는 그의 트렁크를 현관 옆에 놓고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자식을 오랫동안 외국에 보내놓고 기다려온 거처럼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밝게 웃으며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이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반가워서 저녁식사 준비하다 말고 잊고 있었어. 조금만 기다려요."
나는 따라 일어나 그의 이모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이미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의 이모는 나를 보더니 다가와 나의 손을 잡았다.
"윤설이라고 했죠? 함께 와줘 고마워요. 보다시피 다했으니 가서 앉아 있다 들어와요."
"아니에요. 이모님 옆에 있을게요."
그의 이모는 나의 손등을 서너 번 두드리며 나를 쳐다보며 말없이 웃었다. 가끔 거실 쪽을 바라보며 그녀의 남편이 그에게 뭔가 말하며 두 사람이 크게 웃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그가 조카라기보다는 친자녀처럼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거실을 향해 말했다.
"들어들 오세요."
그의 이모부가 자리에 앉자 그도 따라 앉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쉼 없이 계속되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의 이모가 귓속말로 말했다.
"우리 국이 수다쟁이예요. 저런 모습 처음이죠?"
"네."
식사를 마치자 그와 이모부가 에이프런을 허리에 둘렀다. 그의 이모는 나의 손을 잡더니 거실로 데리고 나가 소파에 앉혔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국이 일곱 살 때 언니하고 형부가 계열사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사고로 죽은 후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었어요. 갑자기 당한 일이라 초기에는 남편이 힘들었죠. 사고 당시 우리는 유럽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애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우리 국이는 나한테나 이모부한테는 조카라기보다는 막내아들이죠. 그 후 국이는 한 번도 언니나 형부 얘기는 하지 않았죠."
그녀의 얼굴에 그리움이 스쳐 지나가는 듯싶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도 주방에 있는 그들을 바라봤다.
"오늘처럼 국이가 어렸을 때부터 해온 일이었요. 남편도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국이를 도와 빈 그릇을 날으더니 국이가 외국으로 떠난 뒤에는 맡아했죠. 우리 국이 음식도 잘 만든답니다."
그녀는 주방에서 남편과 웃으며 행복해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빠르게 눈으로 거실을 살폈다. 여느 가정이면 있을법한 가족사진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그들이 설거지를 마치고 커피 향이 가득한 찻잔과 다과접시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는 현관 옆에 놓았던 트렁크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녀 앞으로 밀었다.
"이모가 말씀하신 거로만 담았는데 부족하면 더 구해 드릴게요."
"시간도 빠듯했을 텐데 고맙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는 사이 비는 그치고 창밖은 어둑어둑했다. 그가 일어나자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 품에 안았다.
"2층 치워놨는데."
"내일 일찍 움직여야 해서 '제이'에 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두 분도 같이 가실래요?"
그의 이모부도 서운한 표정이 가득했지만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다음에...... 피곤할 테니 가서 일찍 쉬렴. 설이도 하루종일 긴장했을 거야. "
그의 이모와 이모부는 우리가 길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문 앞에서 움직이질 못하고 서 계셨다.
어둠 속을 달리는 동안 나는 그의 표정을 훔쳤다. 그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돌렸다.
"말도 안 하고 우리 가족과 대면하게 해서 화났어요?"
"아니에요. 두 분은 참 따뜻해 보였어요. 당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말로 안해도 느껴질 정도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분들을 보며 어떻게 화를 내겠어요. 음식도 최고였고 매너도 최상이었어요."
그는 나의 말에 기분이 좋은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모부! 성탄절에 맞춰 올게요. 그때 며칠 쉴 수 있을 거 같아요. 이모한테 전해주세요. 설이가 오늘 음식 최고였답니다."
그의 이모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이제 그만 쉬세요. 연락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