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지나고
스위트룸이었지만 거실은 비즈니스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사무기기가 준비되어 있어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중요한 미팅이나 계약을 위해 움직이지 않아도 되게끔 해놓았다. 창 커튼을 열자 도시의 불빛들이 밤과 어우러져 보는 이를 설레게 하였다. 그는 소파 옆에 있던 여행용 가방 하나를 테이블 위로 옮기더니 나를 불렀다.
"당신 거예요."
궁금한 표정으로 가방을 열자 내가 사용하는 화장품 샘플부터 편의복까지 들어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씩 웃었다.
"많이 피곤할 테니 먼저 씻고 나와요. 난 처리할 게 좀 있어서 나갔다 올게요."
그가 룸을 나가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준비해 준 것들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옆에는 와인과 빈 잔이 놓여 있었다. 욕조에 물이 채워지자 뜨거운 김이 공기 속으로 퍼지며 거울이 뿌연 해졌다. 욕조에 몸을 누이자 하루의 긴장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거 같았다.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왔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을 둘러보니 거실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분명히 소파에서 그를 기다리다 잠든 거 같은데 침실이라니. 샤워를 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편의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낮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그는 내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서류를 펼쳐놓은 채 메모지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몇 시예요?"
그가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창밖을 힐끔 쳐다보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시쯤 된 거 같아. 그런데 왜 일어났어요?"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기대자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내 볼에 닿았다. 나는 아무렇게나 티셔츠를 접어 올려 하얀 살이 드러난 그의 팔을 당겨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의 몸이 기분 좋게 경직되고 그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거지? 이렇게 나를 도발하다니."
그는 깊게 숨을 몰아쉬더니 내 입술에 짧지만 강한 입맞춤을 했다. 욕실에 있던 와인을 마셨는지 그의 입술에 배어 있던 와인향이 내 코끝을 자극했다. 그는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침실을 향해 걸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당신 먼저 자야겠어. 오후에 아주 중요한 미팅이 있거든."
그는 테이블에 흩어져 있는 서류를 눈으로 가리키더니 침대에 내려놓고 돌아서 거실로 나가려다 다시 돌아와 옆에 누웠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으나 뜨겁다 못해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구속감과 깊은 친밀감을 느꼈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서로에게 더 이상의 인내심은 필요 없다는 걸 깨닫게 했다.
지나간 시간 속에 우리의 밤은 봉인된 채 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자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욕실로 걸어갔다. 문을 닫고 샤워기를 틀자 쏟아지는 물줄기에 정신이 맑아졌다. 옅게 화장을 마치고 나오자 언제 일어났는지 그가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음."
그는 밝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어와 두 팔로 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당신 말이야. 흠. 이렇게 예쁘게 하면 반칙이지."
나는 그를 살짝 밀어내며 침대 옆 시계를 가리켰다.
"괜찮겠어요?"
나의 말에 그는 아쉬워하며 작게 한숨을 뱉고는 돌아서 욕실로 들어갔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서류를 뒤척였다. 서류별로 연결되어 있는 내용을 묶어 그가 읽기 쉽도록 정리해서 그의 서류가방에 넣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테이블 위가 깨끗하자 그가 나를 쳐다봤다. 내가 그의 가방을 들어 보이자 그는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가방 속에서 서류 파일을 꺼내 들고 다른 손으로 나의 손을 잡고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5층에서 멈추고 문이 열리자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앞장서 레스토랑 창가 옆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당신도 가볍게 먹는 게 좋겠죠?"
"네."
날이 좋아서인지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창밖 풍경도 어제와는 다르고 깨끗한 게 나뭇잎까지 제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가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누군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