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당신
나의 하루는 차 안에서 시작된다. 며칠간의 휴가를 마치고 조금은 어색한 기분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면서 '가끔은 일에서 벗어나 휴식시간을 가져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 화단에는 언제 심어놓았는지 모르는 매실나무 한그루가 2층 창문에서도 만질 수 있는 정도로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누가 창문을 열어놓았는지 매실나무의 잎새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열린 매실이 빼꼼히 얼굴을 드러냈다. 열린 매실도 반가웠지만 매실나무의 가지를 이리저리 흔드는 바람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남편과 동행하는 출근길이 새삼 고맙고 행복했다. 아침이면 항상 듣게 되는 <졸리면 의자 뒤로 젖히고 자. 도착하면 깨워줄게.>라는 남편의 말이 오늘은 더 매혹적으로 들렸다.
아침 출근길이면 꼭 듣게 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MBC 표준 FM에서 방송되는 시사프로그램 '아침&뉴스, 김성경입니다'이다. 오늘은 김성경 씨의 오프닝 멘트가 끝나고 바로 Eric Carmen의 All By Myself (Single Version)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는 Eric Carmen의 대표곡으로 서정적인 멜로디가 돋보인다고 한다.
젊었을 적에는
아무도 필요치 않았어요
첫 음부터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이 아침, 고속도로 옆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하얀 이팝나무 꽃들과 그 꽃잎에 잠시 머물렀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바람, 산허리를 엷게 감싸고 있는 아침 안개와 잘 어우러졌다. 나는 어느새 허스키한 듯하면서도 맑은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Eric Carmen의 'All By Myself'를 많이 듣게 될 거 같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멋진 목소리만 듣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출근한 후에는 업무적으로 전화 통화를 길게 많이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내 귀에 들려오는 첫마디부터 감정 섞인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심지어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전화를 아침에 받는다면 하루 종일 기분이 다운되어 버린다.
업무를 맡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날도 하루 종일 '빨리빨리' 외치는 사람들로부터 전화 독촉을 받아 지칠 대로 지쳐 퇴근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시간을 몇 분 안 남기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끝까지 나를 가만 안 둘 건가 보다 생각하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내가 소속과 직책 그리고 이름을 말하자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전화기 액정에 뜬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여보세요!> 라고 말을 했다. 곧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한여름 태양이 뜨겁게 내려쬐는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하루의 고단함을 위로라도 해주려는 듯한 그런 맑지만 전혀 가벼움이 없는 진지한 목소리가 내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00 담당자 맞으신가요?>
<네. 제가 담당자입니다만>
<담당자가 저처럼 남자인 줄 알고 생각 없이 전화드렸는데 여자 목소리가 들려와 제가 잘못 걸은 줄 알고 확인하느라 답이 늦었습니다.>
그래 '당신은 그럴 수도 있지.'란 나만의 합리적인 판단이 개입되었다.
<네에.>
잠시 쉼표, 다시 듣는 이를 매료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00부 00과 000 사무관입니다. 결과를 봐야만 사업을 시작하는데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확인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발송 대장을 확인한 결과 이미 우편으로 통보된 자료였다. 그날 그 사무관과의 짧은 통화였지만 나에게는 긴 여운으로 남았다. 잘생긴 외모는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지만 좋은 목소리는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은 결코 나 혼자만 외롭게 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있으니까.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 차는 경찰서 마당에 도착해 있었다. 남편은 나를 내려준 다음 마당을 돌아 경찰서를 나갔다. 3층 사무실을 쳐다봤다. 아직 모두가 출근 전인지 불이 꺼져 있었다. 좋은 노래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매일 남편이 운전해주는 차로 출근을 해서일까 기분이 다른 때와는 달랐다.
그래. 오늘부터 1일이다. 며칠간 휴식으로 몸도 마음도 충전하였으니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나와 만나고 나의 목소리를 듣는 이에게 맑고 밝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거다. 사무실 문을 열자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나도 모르게 <좋은 아침입니다.>하고 말을 건넸다. 수화기 저편에서 남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