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다.

여정 [旅程].

by 금다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늘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볍게 입 밖으로 흘려버릴 수는 없었다. 선배가 조난 사고를 당한 순간 모든 게 끝나버린 듯 절망스럽고 가지 말라고 잡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감정들은 점점 옅어지고 기억 또한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지 일상이 덤덤해지며 의미가 사라져 갈 무렵 내가 견뎌냄을 고맙게 여겨지게 한 이가 지금 내 옆에 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향불의 잔향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쟈켓을 벗어 내 무릎에 놓은 후 와이셔츠 단추도 풀어 소매를 반쯤 걷어 올렸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차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서로가 말을 하지 않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돼 있었다. 어제와 오늘 사이 그와 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떠오르는 생각도 내 눈앞에 펼쳐지는 산과 들의 흐름도 달라져 있었다.


그를 바라보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무슨 생각해요?"

"아무 생각도. 그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는데 아무 말도 없었던 거야? 난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더니 너무 배고프다. 우리 민 형한테 가서 밥 달라고 하자."

그는 대답도 하기 전에 차 방향을 돌렸다. 추수가 이미 끝난 논에는 새들이 날아들어 떨어져 있는 낱알들을 찾고 있었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거센 바람 때문이었는지 잎새들이 반쯤 떨어져 여기저기 뒹글고 있었다. 곧 첫눈이 내릴 거만 같았다.


민이 운영하는 티파니가 멀리 눈에 들어왔다. 마당으로 들어가자 민이 나와 뒹굴고 있는 나뭇잎들을 쓸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갔나 이곳은 고요했다. 차에서 내리자 민이 빗자루를 옆에 세워놓고 걸어왔다.

"가다가 너무 배고파서 왔어요."

그가 손으로 배를 가리키며 웃자 민은 그의 어깨를 툭 치더니 따라 웃었다. 민은 뒤에 서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서 와요. 들어가죠."

"여기는 조용하네요. 태풍이 지나갔나 봐요."

"네. 뉴스 들으니 우리나라를 벗어나더니 소멸되었다고 하네요."


우리는 민을 따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연속으로 흘러나오던 팝송도 들려오지 않았다. 카페 안은 손님이 없어서인지 적막하게 느껴졌다. 그는 마을 풍경이 잘 보이는 창 옆에 앉았다.

"가장 빨리 만들 수 있는 거로 줘요. 안 그럼 곧 쓰러지는 거 보게 될 테니."

"엄살은. 알았으니 얘기들 나누고 있어. 가장 간단한 거로 빨리 만들어올게."


민이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후 햇살이 창안으로 스며들며 그의 하얀 와이셔츠가 더욱더 눈을 시리게 했다.

"내가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처음에는 몰랐지."

그는 창밖의 하늘을 가리켰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바람소리가 잦아들더니 오후의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치더라고. 그때 차 라이트 때문인지 그쪽에 반짝거리는 게 있었어. 그래서 유심히 봤더니 차 한 대가 비망사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어 당신이 왔구나 생각했지."

그의 추리력에 놀랐다.

"피곤하지 않아요?"

"괜찮아. 지금은 너무 배고파서 그런지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어."

민이 양손에 파스타가 가득 든 접시를 들고 걸어왔다. 그는 포크로 둘둘 말아 입에 밀어 넣고 오물거렸다.

"그렇게 배고팠으면 어디 들어가서라도 먹지 그랬어. 너도 참. 아직도 그렇게는 안 되는 거야?"

"조금만 참으면 이렇게 맛있는 곳이 있는데 내가 왜. 혹시 내가 오면 귀찮아서 그래?"

"절대로 그건 아니고. 배고프다면서. 그만 말하고 빨리 식사해."

민은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갔다. 그가 민을 부르자 커피 향이 가득한 잔을 들고 걸어왔다. 민은 그의 옆에 앉더니 빈 잔에 커피를 따랐다.

"같이 드시죠."

"그럴까요?"

민은 일어나 빈 커피잔을 들고 왔다. 민이 내린 커피 향은 부드러웠다. 연하게 마시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 최고였다.

"어디 가는 길이었니?"

"아니. 집으로 가는 길에 배고파서 들어왔지."

"그랬구나. 윤설 씨 입맛에 커피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저번에 연하게 마시는 거 같아서."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그는 내가 마시던 커피잔을 가져가더니 한 모금 입안으로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아! 당신은 이렇게 마시는구나. 형한테 비율 알아봐서 앞으로는 이렇게 내려줄게요."

우리는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갈게요. 한번 나와요."

"그래. 전화할게."

민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왔다. 차에 올라 들길을 반쯤 달리자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길 옆에 차를 세웠다.

"잠깐 내릴까요?"

차에서 내리자 길옆 논에는 벼들이 노랗게 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풍에 넘어진 벼들도 보였지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벼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그는 말없이 어딘가를 응시했다. 아직 밝은데 건너편 마을엔 하나 둘 불빛이 창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차에 기대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봤다. 저녁 바람이 불어오자 그는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쌌다. 우리는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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