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태어나고 몇 년 후,
다니던 병원이 무슨 일인지 문을 닫게 되어 다른 병원을 찾아야만 했다. 가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아 집으로 내려와 있었다. 하루는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의 부탁으로 대전과 인접한 명소(名所) 몇 군데를 돌아보기 위해 대전으로 향했다. 기차가 대전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을 당시 30대 초였던 거로 생각한다. 오뚝한 코에 쌍꺼풀이 짙고 날씬했던 몸매에 서구형 미인이었다.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닐 텐데도 옷을 입는 감각이 남달랐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 입은 옷인데도 시대에 맞지 않게 심플하면서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평소 동네 어르신들 간에 주고받는 얘기로 대충 알 수 있었지만 정이 많아 보였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어쩌다 문 앞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뛰어와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녀를 낳을 때 도움 준 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궁금해 그녀의 가족들이 살았던 동네를 찾아갔다. 그녀의 가족을 아는 이들이 몇몇 살고 있었지만 두 모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이력서를 보냈던 병원으로 향했다.
pixabay - 증기기관차
그러나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다시 만난 곳은 뜻밖에도 그녀가 태어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신병원이었다. <정신병원>이라고 말하면 놀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곳 또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그곳은 그녀의 어머니가 근무하는 직장이었다.
서로 만나지 못한 4년 동안 두 모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건강하고 활달한 모습이었다. 상고머리를 하고 까만 눈동자의 맑은 눈으로 그녀의 어머니 치맛자락에 숨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광목을 잘라 만든 겉저고리에 검은색으로 물들인 까만 광목 치마를 입고 흑 고무신을 신은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친동기라도 만난 거처럼 반가워하며 나의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하더니 그녀의 어머니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그녀의 어머니 외에도 여러 명이 더 있었다. 낯선 이의 등장이 놀라웠는지 아니면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온 방문객이 처음이라 그런지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녀에게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모두가 이모이고 삼촌이며 언니이고 오빠이고 가족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녀가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그녀와 나의 거리도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 무릎에서 내려와 나의 무릎에 앉았다. 내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들어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망울이 맑아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내가 그곳에 나타난 게 신기했는지 답할 새도 없이 이거 저거 계속 묻기만 했다. 대답하다 보니 그녀의 다른 가족이 궁금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난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어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로 들어갈 때는 보지 못한 화단의 가장자리에 넓은 돌이 보였다.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도록 위는 고르고 편편했다.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그간의 소식을 들었다. 그녀 어머니의 남편은 그녀가 태어난지도 모른 채 집을 나가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생활고는 더욱 심해지고 젊은 여자 혼자 6남매를 키운다는 게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곳 직장을 구하고 보니 아이가 없어야 된다는 게 채용 조건이었다. 사정사정하여 그녀만 데리고 있을 수가 있었다.
그녀의 이모한테 이와 같은 사정을 말하고 5남매의 거취에 대하여 상의를 하자 <생활이 나아지면 가족이 다시 모여서 살면 된다.>라고 위로하며 고아원에 맡기자고 권했단다. 그녀의 어머니는 피눈물을 삼키며 5남매를 고아원에 잠시 맡기기로 결정했다. 고아원으로 들어가는 날에도 부모 중 누구라도 보이면 안 되었기에 먼발치에서 그녀의 언니와 오빠들을 쳐다봐야만 했다고 한다.
이런 숨겨진 사연으로 인해 그녀는 6남매의 막내이면서도 졸지에 외동딸 신세가 되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릴 때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그녀 또한 울고 있었다. 그녀의 울음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살짝 미소를 짓자 그녀 또한 활짝 웃었다. 이렇게 예쁜 아기가 세상에 나온 줄도 모르는 그녀의 아버지가 불쌍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당에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내가 더 이곳에 함께 있어주기를 원했지만 친구와의 약속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제일 신고 싶어 하는 <빨간 구두를 사 가지고 다시 오겠다.>라고 말한 후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후 두 모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나의 뒷모습을 지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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