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신데렐라

빨간 구두 아가씨.

by 금다요

우연히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지 벌써 몇 개월이 흘렀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한 두려움으로 여러 날을 잠도 자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녀와의 약속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런 내가 처량해 보였는지 친구 부탁으로 출판사에 출근하기 시작했지만 하는 일이라야 친구가 업무차 외근 나갔을 때 사무실을 지키며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거였다.


차들이 덜컹거리며 사무실 앞을 지나갈 때마다 길에는 흙먼지가 자욱했다.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나는 멍하니 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어느 날에 가겠다고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오리라 믿고 한없이 기다릴 그녀가 생각났다.

흑 고무신 밖에 신어보지 않은 그녀한테 '빨간 구두'를 사 가지고 가겠다 말했으니 분명히 그녀는 손가락을 세어가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내 기분에 어린아이한테 약속을 한 거 같아 후회가 밀려왔다.


후회와 미안함으로 하루가 가고 한 달이 지나갔다. 그녀의 어머니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친구한테는 미안했지만 대전으로 내려가기로 맘을 먹고 나니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제일 먼저 신발가게에 들러 빨간 구두 한 켤레를 샀다.



어떤 여자 아이의 빨간 구두



다음날 나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덜컹덜컹거리는 완행열차지만 벌써 대전역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기차에서 삶은 달걀로 허기를 달래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멀리 그녀가 보였다. 병원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마당에서 그녀보다는 나이가 한두 살 더 먹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돌아서더니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아저씨다.>라고 외치더니 내게로 달려왔다. 건물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어머니가 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얼마 전 만났을 때보다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언제부터 마당에서 뛰어다녔는지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서로 엉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고서 병원 입구로 걸어갔다. 그녀는 맑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어머니가 다가와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만 내려놓으세요. 여태 밖에서 뛰어놀아 땀냄새나요.>

<괜찮아요. 잘 지내셨죠?>

<저희는 잘 지냈어요. 직원 채용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면접 보러 오신 거죠?>

<네. 저 원장실에 다녀올게요. 제 가방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가방을 맡겨 놓고 원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원장은 50대 중반 가까이 먹어 보였다. 지원하게 된 동기와 가족사항을 묻고는 바로 근무가 가능한지 물어봤다. 흔쾌히 지금부터 근무할 수 있다고 말하자 사무실로 가서 숙소 배정을 받으라고 말했다. 원장실을 나온 나는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두 모녀를 찾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직원 숙소가 있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복도 끝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두 모녀가 지내는 방이었다. 내가 원장실에 있는 동안 목욕을 시켰는지 조금 전 마당에서 본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예쁘게 생긴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pixabay - 어린. 소녀.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그녀의 어머니는 내가 맡긴 가방을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방 배정을 받았는지 궁금해했다.

<제 방은 바로 옆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가방에서 그녀에게 약속한 '빨간 구두'를 꺼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커지더니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히고는 빨간 구두를 신겼다. 그녀는 처음 보는 빨간 구두가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그녀는 빨간 구두를 벗어 양손에 들고는 마치 신에게 올리는 제(祭)를 주관하는 제사장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듯 이상한 말을 계속 뱉어냈다. 한참 동안 그녀는 나와 그녀의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라고 말하자 그제야 이상한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한쪽 뺨에 입술을 댔다 떼었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니 그녀의 베개 옆에 빨간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지 연신 뭐라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꾸밈이 없는 그리고 사랑스러운 그녀를 바라보며 이곳에서 두 모녀와 함께 할 시간들이 기대되었다.


하나 둘 방마다 불이 꺼지는 걸 보며 내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이따금 마당 옆 강아지 해피의 짖는 소리만 들려올 뿐 세상은 밤의 세계로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