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 일정을 전달받은 후 탁상 달력 해당 날짜 아래 '당직'이라고 쓰고 나니 당직이 가까워질수록 매사가 우울모드로 바뀌기 시작했다. 당직근무 라야 민원전화 및 방문객 담당부서 안내 등 단순 업무지만 밤이 주는 공포와 주취자(酒醉者 - 술에 취한 상태에 있는 사람)의 방문 때문에 후반 근무를 해야 될 때는 극도로 예민해졌다.
뉴스- 한국일보
후반 근무는 다음 날 새벽 01:00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전반 근무자와 교대를 한 후 먼저 사무실 시정 장치 확인 및 화재 예방을 위하여 청사 및 주변을 순찰하게 된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낮과는 다르게 사방이 고요했다. 간간이 청사 옆 도로로 빈 택시와 경찰서 마당을 어슬렁 거리며 배회하는 고양이들뿐이다.
마지막 순찰함을 확인하고 싸인(sign)을 남긴 후 당직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당직실에서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숨차게 달려와 수화기를 들고 <친절하게..... >라고 말하려 하자, 혀가 반쯤 말린 듯한 아니 심하게 꼬부라진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만의 징크스(jinx)인지는 몰라도 비 오는 날 당직 근무만 하면 이상하게도 주(酒)님의 힘을 빌린, 다음 날이면 기억도 못할 이상한 민원을 해결해달라고 걸려오는 전화도, 찾아오는 민원인들이 많았다. 설마 설마 했지만 역시였다.
목소리 주인공의 첫마디가 '여자 경찰'이냐고 물어왔다. 경찰은 아니지만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일반직 공무원이라고 말하자
< 경찰이 아니라고?....... >
아저씨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는지 아니면 졸고 있는 건지 전화는 끊긴 건 아닌데 수화기 너머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수화기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휴우~ 숨을 몰아쉬고 의자에 앉아 TV를 켜려는데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 감사합니다. **경찰서...... >
이번에도 내 말을 끊으며 먼저 치고 들어왔다. 조금 전 그 아저씨였다.
< 경찰이라고 했나! 경찰이 아니고 뭐라고 했지? >
난 전화를 끊을 수도 없고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난감하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급한 전화가 걸려올 수도 있기에 나는 '다른 민원인이 기다리고 있어 전화를 끊겠다'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이봐 이봐 지금 몇 시인데 민원인이 와........>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나 보다. 나도 수화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자기 말만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아저씨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으니 은근히 화가 났다.
10여분이 흐르는 동안 전화벨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이젠 안 하시려나 안심하는 순간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액정에 뜬 발신번호를 확인하니 조금 전 그 아저씨였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수화기를 들었다.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아저씨는 화부터 내더니 똑같이 물어왔다.
< 정말 경찰 아니야? 그럼 경찰도 아니면서 전화는 왜 받아! 빨리 경찰 바꿔 씨**아! >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야간 근무도 힘든데 이런 전화 민원은 힘들다 못해 무서웠다.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두 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게 충혈되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당직실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지며 숨쉬기가 힘들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상대한다고 함부로 대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 텔레마케터나 고객상담실 등에서 근무하는 이들의 고통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TV에서 방영된 '감정 노동자와 서비스'란 제목으로 <콜센터 여직원> 광고처럼 아무리 화가 나고 서러워도 친절하게 웃으며 <네. 고객님.......>이라고 말해야 되는.
그 날처럼 당직 근무하면서 힘들었던 날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 힘들었던 몇 시간으로 인해 당직날이 가까워질 때면 '제발 비만은 오지 않게 해 달라'라고 두 손을 모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