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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석금 Apr 27. 2019

할아버지 가라사대.

여자 화장실이 왜. 

얼마 전까지 내가 담당했던 업무는 매년 연말이나 새해 연초만 되면 기간 내 처리해야 할 업무의 양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늘어났었다. 일시적인 현상이었지만 정부 세종청사 각 부처나 공공기관 등에 그 결과를 통보해야 되기 때문에 정해진 날짜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을 해야만 한다.     


담당 업무 성격상 여러 제약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법률적인 책임까지 뒤따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이 퇴근한 후 조용한 가운데 보고서를 검토하곤 했었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직원들은 자기네들도 담당 업무가 따로 있고 내 업무의 성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퇴근 후라도 휴식을 권했다.


< 내가 '일벌레'도 그렇다고 '일중독'인 환자도 아닌데 왜 일찍 퇴근하고 싶지 않겠는가! >      

그러나 상대 기관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받기 원한다.


-   Daum 저작권 없는 무료 이미지   -




지난 1월 초도 담당업무 이관도 있었지만 처리해야 할 보고서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걸 못 보는 소심함 때문에 기일 내 담당 업무를 끝내기 위해서는 야간 근무를 해야만 했다. 


그날도 경찰서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오전에 다른 직원이 민원업무를 처리하느라 점심 식사가 늦어 속도 거북하고 두통도 있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3층 사무실을 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1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습관처럼 스크린 도어(screen door) 옆 안내석을 쳐다봤다. 경찰서 내방객(來訪客) 안내를 위해 이 곳에서 근무하던 대원도 저녁 식사를 하러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경찰서 홍보판을 보고 서있는데 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이 화장실 쪽으로 뛰다시피 급하게 걸어가셨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따라 가는데 할아버지가 여자화장실로 들어가려 하셨다.   


<할아버지! 거기는 여자 화장실이에요. 남자 화장실은 이쪽이에요.>

손으로 남자 화장실을 가리켜 드렸지만 할아버지는 허둥대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화장실로 들어갈 생각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셨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내 딴에는 친절하게 안내를 해드린다고 했던 게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기분을 불편하게 한 거 같았다.

<뒷간이 다 같은 거지. 경찰서라 그런가? 여기는 따로 쓰나 보네 그려. 우리 집은 말여. 할망구 하고 같이 쓰거든.>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집에서 가족끼리 사용하는데 남녀를 구분해 따로 쓴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할아버지께는 죄송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웃음이 터졌다. 내가 복도가 떠나갈 듯 웃자 할아버지도 멋쩍으셨는지 웃으시며 남자 화장실 안으로 사라지셨다. 


화장실 앞에서 할아버지가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사무실로 올라왔다. 참 나도 어쩔 수 없는 가보다. 할아버지가 걱정되어 창가로 달려가 경찰서 마당을 내려다봤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밖으로 잘 나가시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잠시 후 허리춤을 만지작 거리며 정문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가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혼자 다니시는 게 맘에 걸렸지만 그래도 화장실을 찾아 경찰서로 들어오실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 여겨졌다. 


할아버지가 경찰서에서 집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한동안 생각이 났다. 일에 쫓겨 웃을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나에게 그날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은 웃음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나, '세대 간 시각(視角)의 차이'에 대하여 한번 더 생각할 여유까지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동안 내가 '공무원'이라고 소개하면 대부분 표정이 어두웠었다. 그들은 내가 '꽉 막힌 사람' '규정만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나 보다. 스치듯 짧은 한 할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인해 나는 오늘도 그 차이를 좁혀 보려 노력하고 있다. 


pixabay - 카메라 찍듯 선명한 노년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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