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나무마다 연둣빛 새순이 작게 돋을 무렵.
난 부모님과 함께 온 낯선 아가씨와 대전역 근처 찻집에 앉아 있었다.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겨버린 아들이 못 미더우셨는지 손수 며느리감을 데리고 내려오신 것이었다. 부모님과 앉아 있는 낯선 아가씨는 작은 키에 복스런 얼굴이었다. 웃을 때마다 그녀처럼 작은 보조개가 따라 웃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힐끔거리는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그녀는 연신 뜨거운 커피만 호호 소리 내어 불고 있었다.
<서울 오면 집에 다녀 가라고 해도 말을 안 들으니 내가 내려올 수밖에. 여기 이 처자는 작년 봄에 간호대를 나와 큰아버지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너를 위하니 네 아비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한다.>
할 말을 다하셨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머니 손을 잡아끌고 휑하니 찻집 밖으로 나가셨다. 찻집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할 말이 더 없어져 서로가 애꿎은 찻잔만 들었다 내려놨다 했다.
<제 이름은 윤희예요.>
<이름이 뭐라고요?>
<윤희예요. 강윤희라고 합니다.>
나는 이름이 '윤희'란 말에 그녀가 떠올랐다. 순간 '윤희'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 나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저는 박상현이라고 합니다.>
<아버님한테 들었어요. 이곳 병원에 계신다고.>
그녀는 말투도 조용조용한 데다 품성도 아버지가 며느리감으로 점찍을 정도로 순종형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오래 만난 연인들처럼 나에게도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더 맘에 들었던 것은 서울 병원을 그만두고 이곳 병원에서 나와 함께 근무하고 싶다는 말에 그녀에게 어떤 신뢰감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여기저기 봄꽃이 피고 고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어느 봄날, 병원 옆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고 나의 지나온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갖게 해 주었던 나의 작은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 손을 꼭 잡은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높은 의자 탓인지 두 다리만 앞뒤로 흔들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교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미소만 지은채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예식이 끝나고 여행을 떠나기 전 난 그녀를 만났다.
<엄마 말씀 잘 듣고 건강하게 지내.>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잠시 품에 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내게로 전해졌다.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안녕'을 고하고 그녀의 어머니와 인사의 말을 나눈 후 나의 신부가 기다리는 곳을 향해 걸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병원 직원들에게도 감사인사를 나눈 후 난 신부와 함께 병원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내 옆에 있는 낯선 여인과의 만남이 부끄러웠던지 내 근처를 서성일뿐 거리를 두고 따라오더니 결국 병원 입구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짧게 손을 흔든 후 돌아서 신부의 손을 잡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맑은 햇살 속에 나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는 교회의 종소리만 힘차게 들려올 뿐.
나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서있을 그녀가 맘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나는 돌아서 그녀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안녕. 나의 작은 천사여. 너의 미래에 행운만 있길.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