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6 (D-31)
글감이 떨어졌다. 아니 글감이 없는 게 아니라 하루 만에 쓰기엔 부담스러운 글들이 많이 쌓여있다고 보면 되겠다. 주야장천 이탈리아 이야기만 해서 이탈리아 이야기 말고 다른 걸 적어 봐야지 하지만 머리속에 떠오르는 건 이탈리아 밖에 없다
여행 사진을 보면서 '아 이건 사 왔어야 했는데, 이건 몇 개 더 사 올걸' 이런 후회들과 '어디는 못 가봤고 아쉬우니 다시 가고 싶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여행 후의 며칠을 보내고 있다.
내 모든 숙박 예약을 담당했던 아고다 사이트에서는 계속 나를 고문하듯 너에게 특별한 할인권을 줄게! 너 이 숙소 어땠어 후기를 적어볼래? 이런 메일들을 보내고 비행기 표를 예약했던 klm 항공사에서도 여행은 잘 다녀왔니? 우리에겐 좋은 일정의 표가 많아~ 하면서 나를 괴롭힌다. 나를 그만 괴롭히렴.
여행지에서 밤마다 의미 없는 가계부를 기록하긴 했지만 오늘에서야 내가 해외에서 긁은 카드 내역을 확인했다. 유로로 계산할 땐 숫자가 작은데 한화로 보니 흠짓하게 된다. 달러나 엔화나 0을 더해서 생각하면 편하다지만 유로는 1유로에 1300원인데 항상 나는 1000원인 것처럼 생각하고 지냈을까. 하하 돌이킬 수 없다. 이탈리아 가서 환불받을래?
글을 쓰는 와중에도 메일이 하나 왔다. 메일을 자동번역해보면
Lee 부인,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라가모의 경험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다음에 우리와 함께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항상 당신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행복을 빌며,
Saki Nagamine
엄마의 뒤늦은 생일 선물로 큰맘 먹고 페라가모에 가서 지갑을 하나 샀는데 직원이 무슨 종이를 작성하라고 해서 적어 줬더니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나 부인 아니라고! Ms를 안 붙이고 Mrs를 붙이 나쁜 페라가모 직원아!
내가 이탈리아 여행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책 이다혜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에서 보면 해외여행을 많이 다닌 작가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꼭 어디를 떠나고 외국을 가야만 여행이 아니다. 현재의 삶도 충분히 여행처럼 살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여러 곳을 가봤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되긴 한다. 나도 지금은 벌써 과거가 돼버린 여행에서의 생각들을 회상하며 그리워하고 있지만 내가 현재 있는 곳에서의 인생 여행을 즐겁게 하는 거에 초점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