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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좐느 Apr 30. 2018

엄마와 캐리어

0430 (D-45)

엄마와 캐리어


엄마가 엄마의 친구와 태국 패키지여행을 가게 되었다. 급하게 잡힌 일정이라 내가 부랴부랴 환전해오고 엄마는 태국 가서  먹을 과자와 간식을 잔뜩 사 왔고 고기 넣은 고추장까지 만들었다. 커다란 샴푸랑 린스까지 여행 목록에 추가되었다. 여행이 아니라  이사 가는 것 같어.

우리 집에는 캐리어가 4개나 있다.  20,25,29 인치 크기별로 가지고 있는 캐리어는 여행병 걸렸었던 나의 흔적이고 최근 나와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서 엄마가 쓸  25인치 캐리어를 하나 더 구입한 상태다. 저녁 비행기여서 4시 23분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을 가기로 했다. 밤낮이 바뀌어서  낮에도 꿀잠자고 있는 딸을 엄마가 급히 깨운다.
"이거 어떻게 잠가. 안 잠겨!."
다급한  엄마. 엄마는 지퍼로 편하게 잠글 수 있는 엄마의 캐리어는 같이 여행 가는 친구 아줌마를 빌려주고 내 캐리어에 짐을 잔뜩 넣은 상황이었다. 내 캐리어가 좀 불편하다. 나도 가성비가 좋다는 말에 버튼 잠금 형식의 캐리어를 샀었는데 잠그고 열 때 불편하고 끌고  다닐 때 시끄럽고 그래서 잘못 샀다 싶은데. 나도 사용하기 영 불편해서 이탈리아 여행 갈 때 내 거 두고 엄마의 지퍼 캐리어를  가지고 갔었단 말이다! 

내가 봤을 때는 이미 캐리어 한쪽 버튼은  엉켜서 움직이지 않았다, 버튼 안쪽이 벌어져야 하는데 화석처럼 굳어서 움직이질 않는다. 남은 한쪽도 분명 걸어서 딱 누르기만 하면  되는 건데 뻑뻑하니 걸리질 않아.. 아.. 어쩌지..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엄마는 내 버튼식 캐리어를 무력으로 망가뜨렸다.  지금 망가진 캐리어가 문제가 아니지. 이미 4시가 넘은 상황이고 엄마는 23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자다 깨서 정신도 없고  아무리 해도 잠가지지 않아서 끈이라도 없나 집안을  서성이는 사이에 엄마는 괴력을 발휘해서 한쪽 버튼을 잠궈버렸다. 그렇게  버튼식의 캐리어의 한쪽 잠금 잠치만 하고는 공항으로 부리나케 떠났다. 
"공항에 캐리어 팔지? 가서 사야겠다" 
하면서.

엄마는 공항으로 떠났고 괜스레 걱정이 됐다. 중간에 캐리어 터지는 거 아닌지. 캐리어를 잘 옮겨서 비행기 타는 건지. 
"공항갔어?" 
라고 톡을 보내니
"비행기 타러 들어갑니다"
라고 톡이 왔다. 카톡상에 엄마 말투와 맞춤법은 이상하다. 내용상 질문인데 물음표는 언제나 없고, 로봇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스마트폰을 쓴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문자 보내는 게 어색한 엄마. 그래도 요즘엔 띄어쓰기를 해서 보낸다. 그전에는 시조였는데
"캐리어 삼십일만에 샀어 썸라이터것"
이라고 답문이 왔다.
"샘소나이트 비싼 것도 샀네"
딸의  대답. 인터넷에서 사면 싸고 괜찮은 거 많은데 엄마가 말하는 썸라이트는 샘소나이트라 예상된다. 공항에서 신상을 젤 비싸게 샀나 보구먼! 딸의 캐리어는 공항에 버렸을 테고.. 어떤 걸 샀길래 캐리어가 30만 원이나 하는지 궁금한 상황이다. 그렇게 엄마 덕에  애물단지 같았던 버튼식 내 캐리어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우리 집에서. 전화위복일지도 몰라!

기계나  새로운 도구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 스마트폰으로 쉽게 할 수 있는 뱅킹을 여전히 은행에 직접 가서 하고 휴대폰 사진기가 셀카  모드가 되었을 때 반대로 바꾸는 걸 몰라 꽃놀이 갔을 때 사진을 하나도 못 찍어 왔던 적도 있다.  빠르고 편리하게 바뀌는 세상이  되어가는데 엄마는 거기에서 한 발짝 뒤늦게 걸어가면서 딸의 힘을 빌린다. 가끔은 귀찮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아니 이렇게 쉬운 걸 왜 모르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내가 없으면 엄마가 못하는 일이 점점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엄마는 그냥 처음부터 엄마인데 엄마에게 내가 막연히 생각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면 당황스럽고 마음이 좀 그렇다. 엄마 나이로만 보면, 아니 내 나이로만 본다면 엄마는 충분히 할머니가 되고도 남을 나이인데 머릿속에 엄마는 할머니가 아니라 그냥  엄마다. 엄마가 그냥 계속 엄마로만 있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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