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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좐느 May 17. 2018

디자이너의 회의감

0516  (D-61)

디자이너의 회의감


 디자이너 일을 할 때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는 일 자체에 있다기보다 작업을 바라보는 생각 차이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뢰자의 의뢰대로 제작을 하지만 마냥 의뢰대로만 해줄 수는 없거든요. 제가 봤을 때 더 좋은 쪽으로 수정 및 보완을 하기도 하는데 그 [보기 좋음]의 견해의 간극이 크다면 괴로워집니다. 

"잘 나왔다. 수고하셨다."라는 말을 들으면 손님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요리사처럼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는 것이 디자이너 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데 이상하게 만들어 달라고 하거나. 그 이상함이 여러 개 쌓이다 보면 저는 방향성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중심이 무너지는 기분이지요. 더 이상 모가 좋은지 안 좋은지 구분이 되지 않고 '작업이 산으로 가는구나..' 생각하면서 그때부터는 의뢰자가 원하는 대로 기계적으로 만들어줍니다. 디자이너에서 오퍼레이터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영혼 없이 일한다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거예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은 정확한 내용 전달 없이 "알아서 잘 해주세요~"라고 해서 알아서 잘 해주면 그 후에 실낱 하게 수정을 가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낭비하는 시간도 많고 수정이 끝이 없습니다. 목착지를 정해놓고 떠나야 하는데 의뢰자와 함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지요. 여행은 혼자 떠나고 싶습니다. 의뢰자 말대로 제 맘대로 작업 했는데 큰 수정 없이 그대로 끝난다면 그것만큼 운 좋은 일도 없죠. 

 제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은 "폰트나 칼라를 세련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입니다. '그럼 내가 한 게 촌스럽단 말이야!' 화가 나기도 하면서 '그럼 원하는 폰트를 알려달라고!' 속으로 고함을 칩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못하지만요. 그래서 전 세련되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화가 나거든요. 자주 접하는 상황은 아닙니다만 [세련된]이라는 말처럼 애매모호한 피드백도 없을 겁니다. "일단 이건 마음에 안 드니 다른 것를 보여다오"를 애둘러 표현한 말이겠지요. 

 이상적인 의뢰자는 자신의 생각이 명확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사람입니다. 작업물이 나왔을 때 생각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일처리가 깔끔한 사람이 좋지요. 이런 의뢰자는 성격도 무난하고 예의 바른 편이에요. 이런 의뢰자만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 분들과 일하게 되면 수정이 많지 않고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됩니다. 물론 이 명확함도 독이 되어, 레퍼런스와 똑같이 해달라고 하는 경우라면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전의를 상실합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원하는 걸 시각적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지만 기존에 있는 작업과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건 디자이너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고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부끄러운 작업이 됩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의뢰자도 없습니다. 저 또한 완벽한 디자이너가 아니기도 하고요. 그저 일에 있어서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습니다.

 그밖에 의뢰 내용을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의뢰자의 개인적 취향을 알거나 일이 진행되는 외부 상황을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작업만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원하는 걸 간파해야 합니다. 표현을 잘 못하는 의뢰자일 경우엔 이것 저것 질문해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저한테는 수정을 덜하고 빨리 끝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지요. 여러해 일을 해오면서 꽤 노련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 쉽지 않고 일에는 언제나 변수가 존재합니다. 일을 주고 돈을 받는 갑을 관계에서 디자이너가 우위에 서는 상황은 쉽지 않습니다. 거장 디자이너는 다를지도 모르겠지만요. 반복되는 회의감이 쌓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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