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의 기쁨과 슬픔 (2)
(이 글은 바로 직전 글인 #25 "야, 너 랩 해봐."에서 이어집니다.)
처음 보는 선배 앞에서 통성명도 아직 못했는데 졸지에 랩을 해야만 했다. 당시 즐겨 부르던 랩은 다이나믹 듀오의 '서커스' 뒷부분에 나오는 래퍼 도끼의 랩. 가사를 전부 외운 랩은 이것밖에 없었으므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어려운 게 어디 있어요 man
오늘도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
아직은 모든 것에 서툰 나를 걱정해 주는 건 I appreciate
아주 고맙게 느끼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게 내 내 고집
때문에 땅 깊숙이 박혀버린 도끼처럼 이미 박혀져
버린 나의 맘이 나의 Style이 너무 hard해
안 어울린 단 말 내게 좀 그만해요 please stop
Now man I'm tired 언제나 gentle하게 최고라도 아니란 멘트
사람들 앞에서 날리는 건 hell no I can't do that ain't cool
난 할래 난 갈래 형들 말 처럼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길 끝까지 갈래
That's me 그게나 yeah ya' know my steelo
도끼 a.k.a. gonzo I'm tha best 내가 최고 형들이 아무리 그래도
내 맘은 변함 없으니 그만 해도 돼요
족히 오백 번은 따라 불러봤을 이 랩을 선배 앞에서 무려 무반주로 했다, 아니 해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출사표처럼 느껴지는 이 랩을 뱉고는 그 해 힙합동아리의 신입 멤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힙합동아리의 남자, 여자 비율은 거의 9:1이었는데 몇 명 없는 여자 선배마저도 래퍼가 아닌, 그저 힙합이 좋아서 동아리에 온 '매니저' 포지션이었다. 나는 그렇게 대략 20명의 남자들이 활동하는 학교 내 유일한 힙합동아리의 유일한 여성 래퍼가 되었다. 벌스와 훅, 싸비 등의 전문 용어를 배우고 가사 쓰는 법도 배웠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동아리방에 찾아가면 꼭 누군가는 컴퓨터로 비트를 찍고 있었고, 누군가는 장판에 드러누워있었다. "안녕하세요!"가 아닌 "가사 썼어? 연습했어?"라는 인사말이 더 자연스러웠다. 학교 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학교 내 타 동아리의 공연이 있을 때는 찬조 공연도 했으며 타 대학 축제에도 초대받아 공연을 하러 가곤 했다. 유일한 여성 래퍼라 그런지 무대에서 선배들 사이로 내가 나오면 반응이 뜨거웠었다. 선배들은 그런 나를 클라이맥스 부분에 넣곤 했으며, 함성은 두배 세배 더 커졌다.
그렇게 인생에서 다시없을 호시절을 누리던 중, 힙합동아리를 흔들고도 남았던 일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엠넷에서 아마추어 래퍼들의 경연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 랩을 오래 해온 선배들은 당연하다는 듯 지원을 했고, 나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지원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선 '나도 지원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마구 꿈틀거렸던 것 같다. 결국 지원 마감 바로 전 날, 동아리방에서 랩 하는 영상을 급하게 찍어서 지원서를 냈다. 며칠 뒤, 온라인 오디션을 통과했으니 상암으로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답장이 왔다.
(이 글은 '힙합의 기쁨과 슬픔' 3부작 중 2편입니다. 오디션의 결과는 바로 내일 업로드됩니다.)
- 파랑 -
그때를 생각하니 용광로가 생각이 납니다.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던 여성 래퍼 시절...! 조금은 그립네요.
자주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마음엔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이 중 내보일만한 것이 있나 하고요. 현재 매일 한 개의 에세이를 써서 매일 브런치에 업로드하는 '50일 챌린지'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