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랑 Nov 16. 2020

첫사랑 이야기

사랑에 빠지다.

    아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커피와 사랑에 빠진 것은.


    어렸을 때 나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그래서 그런지 외가댁과의 추억이 유독 많았다. 유치원에서 하원을 하면 이웃이었던 외조부모님 댁으로 곧장 갔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맛있게 저녁을 먹고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언니와 놀곤 했다.

    할아버지는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꼭 하셨다. 남색 바탕에 작고 예쁜 꽃무늬가 그려진 고풍스러운 커피잔은 지금도 내 눈에 훤하다. 주전자로 끓인 뜨거운 물을 호로록 붓고 맥심 믹스 커피를 넣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셨다. 이윽고 달달하고 진한 커피의 향이 온 집안을 감쌌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손녀의 간절한 눈빛을 매번 이기지 못하셨다. 찻잔과 세트인 작고 귀여운 금색의 티스푼으로 조금 떠서는 한 입 호로록 맛보게끔 해주셨다.

그때의 커피 향이 지금까지 이어지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중학교 교복을 입을 때에는, 우등생이자 반장이던 완벽한 모범생 언니 밑에서 눈치 보던 시절의 내가 있었다. ‘현대월드타워’라고 명명돼있지만 ‘현대학원타워’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학원이 층층이 들어선 빌딩이었다. 회색빛의 고층 빌딩. 1층에는 유일하게 따뜻함을 내뿜던 ‘칸트의 시간’이라는 노란빛의 북카페가 있었다. 공부에 지치고 학원이 가기 싫을 때면, 홀로 자습을 한다는 핑계로 북카페에서 책을 읽곤 했다.

    그때는 달콤한 초콜릿 시럽이 들어가고 부드러운 생크림이 가득 올라간 아이스 모카커피를 좋아했다.


    수능을 앞둔 고3 시절, 나의 유일한 숨구멍 역시 커피였다. 하루 종일 학교에 독서실에, 그저 앉아서 책이건 문제집이건 잡고 안간힘을 쓰던 게 일상이었다. 아이스 모카커피를 마시고 내내 앉아있자니 입안이 텁텁하여 힘들었다. 그래서 쓴 커피를 마시면 가뜩이나 쓰디쓰던 고3의 일상이 더욱 씁쓸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즐겨 먹던 커피는 에스프레소와 설탕의 조합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프레소로 입가심을 한다고 한다.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원샷으로 마시는 게 아니라, 적은 양의 에스프레소에 커다란 각설탕 한 개를 넣고 휘휘 저어서 그대로 꿀꺽 마시는 것이다. 그러면 놀랍도록 입안이 상쾌해진다. 마치 가글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커피는, 팍팍한 고3의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멋진 이탈리아인’이 된 듯한 착각을 하게 해 주었다.


    학점과 가업에 바빴던 사범대 시절과 상처를 후두룩 입었던 사회인 시절을 거쳤다. 그때에도 항상 곁에는 커피가 있었다. 때로는 입안이 저릿하도록 찐득히 단 아이스 바닐라 라떼가 하루의 위로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쓰디쓴 샷 추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내 정신을 번쩍 차리게도 해주었다.


    프리랜서가 된 지금의 내가 ‘핸드 드립 커피 수업’을 하는 것은 어쩌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첫 시작은 재능기부였다. 내가 좋아하는 걸 공유하는 게 좋았다. 향긋한 커피와 함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면, ‘나의 커피’가 ‘너의 커피’가 되는 순간을 자주 접했다. 나만의 것이었던 ‘마실 것 그 이상의 커피’가 타인의 새로운 취향과 취미가 되었다. 그들이 즐거워하니 나까지 덩달아 즐거워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9년 인생 속에서‘즐거움’이 내 일의 목적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내가 즐겨 마시는 건 한 잔, 한 잔 손으로 직접 내린 핸드 드립 커피이다. 모든 게 빨리빨리 돌아가는 요즘의 세상 속에서, 직접 내리는 커피만큼은 유일하게 ‘느려질 수 있는’ 시간이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드립 포트와 커피 서버에 물을 부어서 따듯하게 데운다. 여과지를 곱게 접는다. 좋아하는 색인 파란색 드리퍼에 접은 여과지를 올려둔다. 원두는 봉지를 뜯을 때부터 향긋함이 훅 코로 들어온다. 새로 산 크림색 전동 그라인더를 위잉 위잉 돌려서 원두를 곱게 간다. 잘게 갈린 원두는 자신의 향을 알알이 뽐낸다. 드리퍼 위에 원두를 톡톡히 올리고, 따끈한 물을 천천히 원을 그리며 붓는다. 머지않아 유리로 만든 커피 서버 안에서 ‘똑, 똑’ 소리를 내며 커피가 떨어진다. 따뜻하고 향기로우며 여유가 뚝뚝 묻어나는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외로움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