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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eator Center Feb 19. 2021

살아있는 글자를 만드는 일

폰트 디자이너 제스타입

하나의 한글 폰트를 완성하려면 2780개의 글자가 필요하다. 한 글자에서 한 문장으로,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사용 범위를 확장하며 시스템을 잡는다. 끈질긴 근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독립 폰트 디자이너 제스타입(ZESSTYPE)은 첫 회사를 나온 뒤로 6년째 글자를 만들고 있다. 은퇴하기 전까지 100개의 서체를 남기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심코 지나친 글자가 다르게 보인다.


Q. 처음부터 폰트 디자이너로 활동한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로 3년 정도 직장 생활을 했어요. 40대가 되면 더 이상 작업자로서 발전할 여지가 적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개인 작업을 시작할 거라면 하루빨리 해보고 싶었어요. 독립을 하면서 폰트 작업을 시작했고 6년 정도 활동했어요. 서체 개발사나 타이포그래피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 혼자 시작했죠. 일러스트레이션 툴은 다룰 수 있으니 글자를 그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Q. 왜 다른 분야도 아니고 폰트 디자인이었나요?


혼자서 작업할 수 있으면서도 경쟁력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어요. 국내 폰트 디자이너가 많지 않은 편이거든요. 서체 개발사에서 일하는 분들까지 다 합쳐도 300명 정도일 거예요.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도 하고 싶고 스트리트 아트나 서브컬처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모든 걸 다 해낼 수는 없잖아요. 여러 개를 동시에 하면 실력을 키우기 어려우니까 하나에 집중하기로 했죠.



Q. 가장 처음 만든 폰트가 뭔가요?


지블랙이라는 폰트예요. 일반적으로 하나의 폰트에서 패밀리 글꼴을 나눌 때 굵기를 기준으로 해요. 라이트, 미디엄, 볼드 이렇게. 지블랙을 만들 때는 ‘그래픽 스타일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어요. 기본이 되는 오리지널 버전은 획이 굵은 산세리프로 작업하되 라인을 강조해 네온사인 타입을 만들고 획이 녹아내리는 느낌을 강조한 멜트다운 타입을 만들었죠. 작업 비용은 텀블벅 펀딩으로 후원받았어요.

*산세리프(San Serif): 고딕체와 같이 획의 삐침이 없는 글씨체



제스타입이 만든 첫 번째 폰트 ‘지블랙’


Q. 지금 초기 프로젝트를 보면 어떤가요? 아쉬운 부분은 없나요?


지금 보면 엉망이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형태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아쉽다고는 생각 안 해요. 그 당시에는 분명 최선이었으니까. 사용성은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보기에는 재미있고 새로운데, 막상 이 폰트를 활용해 작업을 하려고 하면 글자의 캐릭터가 너무 강한 나머지 작업에 조화가 되지 않는 거죠. 자기만족을 위한 작업이었으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취향에 맞는 글자를 만드는 게 더 중요했거든요.


Q. 왜 그런 글자를 만들고 싶었는지 궁금해요.


독특한 사용성을 가진 글자를 만들고 싶었어요. 라틴알파벳에 비하면 한글 폰트에는 채워지지 않은 영역이 많아요. 예를 들어 SF 장르에 딱 맞는 서체가 있느냐고 하면 쉽게 꼽을 수 없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그라피티를 했는데, 그 영향도 있었을 거예요. 그라피티에서는 글자를 그릴 때도 그림처럼 그리잖아요.


한 글자를 크게 키워보면
하나의 작품처럼 보여요



Q. 작업 과정이나 작업물을 인스타그램과 브런치에 꾸준히 올리고 있어요.


인스타그램 인사이트 기능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작업을 좋아하는지가 보여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들인 작업이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은지 더 인기가 많더라고요. 작업을 쉽게 하면 사람들도 알아보는구나 깨달았죠. 처음에는 저를 알리려는 목적으로 시작했는데 요즘은 작업자와 작업물의 서사를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작업물은 인스타그램에 아카이브하고, 작업 과정에서의 고민은 브런치에 적으면서 작업자와 작업물이 모두 성장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요.

Q. 하나의 폰트를 기획할 때는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긴 호흡으로 작업해요. 한 글자를 만들고 느낌과 어울리는 문장을 만들어 봐요. 이렇게 만든 글자나 문장이 축적되면 활자를 만들 수 있는 규칙이 생기죠. 글자가 늘어날수록 이런 규칙은 더 정교 해지고요. 변수가 나타날 때마다 해결하면서 규칙이 다듬어지는 거예요.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잡혔다면 전체 글자를 파생하는 작업을 하죠.



Q. 초성에 쓰이는 기역과 종성에 쓰이는 기역이 다르잖아요. 이런 규칙을 시스템이라고 보면 될까요?

그건 아주 간단한 규칙이죠. ‘가’랑 ‘개’에 쓰이는 기역도 다르고, 고-구-그에 쓰이는 기역이 다 달라요. 그 아래에 들어가는 니은 받침과 리을 받침이 다르고요. 


왼쪽부터 그림 1, 2

초기 작업을 예로 들어 보면 서울(그림1)은 조형 일관성이 있지만 균형이 어긋나 있어요. ‘서'가 작고 ‘울'은 크죠. 한 글자 안에서는 종성이 크고 초성이 작아요. 토요일 밤(그림2)을 보면 ‘요’에서는 초성, 중성이 균일한데 ‘토'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요. 이렇게 조화와 균형을 잡는 것이 디자이너의 작업이에요. 우리는 보통 글자가 모여 있는 모습만 보지만 한 글자를 아주 크게 키워 보면 하나의 작품처럼 보일 거예요.



Q. 기획부터 완성까지, 가장 좋아하는 작업은 뭔가요?


기획하는 단계를 좋아해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이 명확하지 않을 때 그 이미지를 눈 앞에서 확인할 수 있게 명료하게 만들어 주는 거죠. 여러 방향을 제안하고 방향을 좁혀 가요. 그 작업이 제일 좋아요.


Q. 요청이 모호하면 힘들지 않나요? ‘경쾌한데 우울한 느낌이요’ 같은 요구를 하면 어떻게 해요.


그런 요청이 왔다면?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좁힐 거 같아요. 글자의 형태는 경쾌한데 색감은 우울할 수도 있고, 반대로 형태는 우울한데 색감이 경쾌할 수도 있죠. 두 가지 안을 보여 주고 무엇이 더 강조돼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거예요. 하나는 주가 되고 하나는 부가 되는 거죠. 이렇게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이 꼭 스무고개 같아서 재미있어요.




시작과 목표 지점 사이를
한 방향으로 가는 게 중요하니까요.




Q. 지금까지 만든 글자 중에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업은 뭔가요?
대호’라는 가칭을 가진 글자가 있어요. 제 작업에서 분기점이 되는 글자예요. 예전에는 새로운 형태, 기존에 없던 한글 글자를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이 글자는 <수호지>에 있는 고전 활자를 변형하는 작업이에요. 고전에 쓰인 글자를 변형하는 것으로도 새로운 형태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청첩장에도 넣으려고 했는데 아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해서 접긴 했지만요.

Q. 앞으로의 목표가 있나요?
당장은 레터링 실습서를 완성하는 거예요. <한글 글자 표현>이라는 30년 전에 나온 레터링 교본이 있어요. 여전히 레터링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책인데, 워낙 오래되다 보니까 새로운 환경에 맞는 내용을 추가할 필요가 있었죠. 출판사에서 이런 요구에 맞춘 실습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제안해 주셔서 한창 쓰고 있어요. 그리고 독립할 때부터 1년, 3년, 5년, 10년 목표를 세웠어. 지금은 10년 차 목표를 향해 준비하고 있지.


Q. 1년, 3년, 5년 차의 목표는 얼마나 달성했어요?


지금까지는 다 이뤘어요. 애초에 목표를 거창하게 세우지는 않거든요. 소소하게 성취감을 느끼며 사는 거죠. 시작과 목표 지점 사이를 한 방향으로 가는 게 중요하니까요. 물론 최종 목표는 조금 커요. 제주도에 갤러리랑 작업실을 여는 거예요. 제주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Q. 여전히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나요?


좋아하고 재미있고 점점 더 잘할 수 있는 활동이 되고 있어요. 글자는 제게 일이 아니거든요. 주변에서 '뭐 하는 분이세요?'라고 물어보면 디자이너보다 작업자라고 소개하는 걸 좋아해요. 기관이나 기업에서 의뢰한 작업을 하는 건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작업은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레터링을 하거나 로고 타입을 그리는 일은 강연이나 출간 작업처럼 중요한 활동이죠.



Creator 제스타입
독립 폰트 디자이너. 그래피티로 시작해 스트릿아트와 서브컬쳐를 다각도로 재해석하는 그래픽 작업을 했다. 한글 활자의 다양한 인상을 그리는 ‘#하루에한글자’를 아카이브하고 있다.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한글레터링을 가르치고 클래스101에서 글자에 인상을 담아내는 한글 레터링 클래스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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