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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철 타기 힘드시죠

지하철 포비아

by 화문화답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건


긴 연휴가 끝나간다. 좋은 시간들은 빨리 지나가는 법, 아쉬워하기보다 남은 시간을 더 즐겁게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 연휴가 끝나면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다시 출근을 해야 한다. 일도 일이지만 우선은 출근길이 걱정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 또 타야 하는구나. 지하철을 탄다는 것은 산다는 의미이니까.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과 편의성은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한다. 시간이야 당연히 짧을수록 좋지만 편의성은 거리에 비례하기보다는 갈아타는 횟수와 앉아서 갈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어느 장애인 단체가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어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당연한 권리 행사라는 의견과 시민을 볼모로 잡는 행위는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맞섰다. 어쨌든 그 시위를 벌이는 역 중에 하나가 한 때 내가 출퇴근하면서 갈아타던 곳이어서 '나도 힘들뻔했네'하는 이기적 상상과 함께 과거에 내가 겪었던 지하철 포비아가 떠올랐다.



놓쳐버린 보온병


신혼 시절 신대방동이라는 곳에 살았고 출근하는 회사는 압구정동이었다. 2호선을 타고 가다 교대역에서 갈아타야 하는 데, 이게 매일 치러야 하는 '고역'이었다. 신대방역에서는 이미 사람이 꽉 차있어서 타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교대역에서는 갈아타는 길을 펭귄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당시에는 혼잡한 지하철 역마다 '푸시맨'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의 임무는 승객의 안전이 아니다. 최대한 사람들을 밀어서 욱여넣는 일을 한다. 완장을 차고 서있다가 차 문이 열리면 사람들을 객실 안으로 온 힘을 다해 밀어 넣는다. 푸시맨의 강력한 파워에 등이 꺾이고 강제로 다른 사람과 포개지는 상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내가 사고를 쳤다. 아니 손발을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 쇼핑백이 사람들 틈에서 찢겨 나갔고 그 안에 담겨있던 보온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리를 숙일 수 조차 없는 상태라서 내동댕이 쳐진 보온병이 어디로 굴러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지하철 안에 서서히 퍼지는 한약 냄새로 미루어볼 때, 밟히고 채이다가 어디쯤에서 뚜껑이 열린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내릴 때까지도 끝내 그 보온병은 찾지 못하고 내 몸만 떠밀려서 내렸다.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르면 왠지 씁쓸하다. 물론 체력이나 적응력, 인내심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잘 참으며 견뎌낸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하다.



에라, 차를 사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샀다. 내가 산 생애 첫 차는 현대 엑셀이라는 차였다. 창문을 내리려면 레버를 잡고 수동으로 돌려야 하고 파워스티어링이 아니라 주차하려고 핸들을 돌리려면 양손으로 잡고 힘을 써야 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옵션이어서 선택하려면 꽤 큰 금액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변변한 도로 연수조차 받지 못했던 왕초보 운전자는 창문 옆을 스치는 집채만 한 트럭 바퀴에 질려 근 일주일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녔다. 하지만 지하철을 더 이상 타지 않는다는 행복감에 도취해 가까운 곳에 갈 때도 차 키부터 찾았다. 그 후로도 차가 몇 번 업그레이드되는 동안 오너드라이버로서 출퇴근길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물론 당시에는 조금만 부지런하면 교통 혼잡이 지금 보다는 훨씬 덜 하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점점 운전이 귀찮아지기 시작하더니 나이가 들면서 체력, 집중력, 순발력같이 안전 운전에 필수적인 요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난시가 심해서 야간 운전이 힘들었다. 고속도로 주행 중에는 시야가 흐리고 앞 차와의 간격 파악이 어려워 시속 80km 이상은 밟지를 못했다. 뒤 따라오던 차들이 빵빵 거리며 코를 바짝 들이대고 위협하기가 일쑤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도 민폐인가 싶어서 운전보다는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아예 컨디션 최적의 상태가 아니면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음악이나 오디오북을 듣고, 책을 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반사적 효과도 있었다.



지하철 포비아


그러다가 발령을 받아 경기도 안산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6호선을 타고 삼각지 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중앙역에 내려 걷거나 다시 버스를 타고 안산 시청에 도착하면 약 2시간이 걸린다. 왕복 하루 4시간이다. 자차를 이용하면 시간은 비슷하지만 통행료, 주유비, 주차비 등 부대 비용이 만만치 않게 발생할 뿐만 아니라 일단 체력이 감당 불가였다. 운전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와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따로 오피스텔을 얻어 살기에는 이것저것 고려해야 될 것들이 적지 않았다.


3년 가까이 이런 생활을 하니까 몸이 먼저 고장 나기 시작했다. 서있어도, 운 좋게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팠다. 특히 4호선 의자는 바닥이 미끄러워서 아무리 등을 대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으려 해도 엉덩이가 미끌어나 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이어폰을 계속 꼽고 있으니 청력이 약해졌고 이명 현상의 한 원인이 되었다. 지하철 기계 소음을 뚫고 이어폰 소리를 들으려면 높은 데시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딴 데 있었다. 사람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을 그 기간 동안 받았다. 내가 실제로 겪었던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적어본다.


사람들이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한 탓에 지하철 안은 더 비좁게 느껴졌다. 그래도 우리 집은 6호선이 순환하는 지점이어서 갈아타는 곳 까지는 앉아서 갈 기회가 많다. 덩치 큰 아저씨의 쩍 벌어진 다리와 어깨에 밀리면서도 보던 책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젊은 남자와 여자가 내 앞에 섰다. 둘이 같은 검은색 롱패딩을 입었고 잠이 덜 깼는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침 시간인데도 손잡이에 매달리다시피 몸을 지탱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다시 보던 책으로 눈을 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득 날카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김밥이었다. 그 두 사람이 은박지에 포장된 김밥을 오물오물거리며 뜯어먹고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김밥 냄새는 의외로 강력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손으로 코를 막거나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냄새를 피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내가 다른 칸으로 피해야 하나? 그럼 서서 가야 하는데? 내려서 먹으라고 한마디 할까? 그러다 시비가 붙으면 어쩌지? 결국 나도 최대한 숨을 참는 방법으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외면했다. 그들이 빨리 김밥을 자신들의 뱃속에 밀어 넣기를 바라면서.


4호선 사당역을 지나면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지하철 내부가 갑자기 헐렁해진다. 타는 사람들도 대부분 중장년층으로 바뀐다. 이때부터는 밀집도보다는 소음 공해가 심해진다. 100db 정도는 충분할 듯한 아주머니 두 분의 대화가 지하철 기계 소음과 섞여 이어폰을 뚫고 들어온다. 쉼 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30분쯤 강제로 듣고 있으면 그분들의 가족, 이웃, 친구들에 관한 라이프 스토리를 다 파악하게 된다. 그러다가 한 분이 내리면서 말한다. 자세한 건 이따가 통화해!


이런 일들은 지하철을 타다 보면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차를 타는 시간이 길다 보니 어쩌다 한두 번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멘털의 붕괴가 온다. 오늘은 조용하고 점잖은 분들과 함께 탈 수 있기를 매번 지하철을 타기 전에 빌어 보지만,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나.


그렇게 안산에 출퇴근하던 3년 동안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위협을 받았다. 사람들과 마주 서게 되면 흠칫 놀라게 되고 또 무슨 이상한 짓을 겪을지 두려워졌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해 갈까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이 정도면 거의 대인기피증이다. 물론 푸시맨 시절만큼 체력이나 인내심이 받쳐주지 못한 탓도 있다. 어쨌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허리는 좋지 않은 상태이고 사람이 몰려있는 혼잡하고 시끄러운 곳을 질색한다.



해방의 기쁨


여전히 고생하는 분들께 미안한 말이지만 다행히 요새는 거의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해외 근무하는 동안에는 운전해 주는 회사 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불편이 없었고, 퇴직한 이후에는 출퇴근할 일이 없으므로 당연히 지옥철에서 해방되었다. 이것만 해도 큰 행복이다.


COVID19의 카오스 이후, 재택근무가 기업의 복지 차원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도 힘들게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할 것이다. 아마도 지난 시절 내가 지하철을 타면서 겪었던 그 일들을 오늘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참을성이 많거나 성격이 아주 무던한 분들을 제외하고는 힘든 시간이 될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그분들이 이 순간을 잘 참아내기를 응원하고 싶다. 조금은 덜 힘든 하루를 보내기를, 그만큼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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