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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문화답 Jan 23. 2023

지하철 타기 힘드시죠

지하철 포비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설 연휴가 끝나간다. 좋은 시간들은 빨리 지나가는 법, 아쉬워하기보다 남은 시간을 더 즐겁게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 연휴가 끝나면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다시 출근을 해야 한다. 일도 일이지만 우선은 출근길이 걱정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을 또 타야 하는구나.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과 편의성은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한다. 시간이야 당연히 짧을수록 좋지만 편의성은 거리에 비례하기보다는 갈아타는 횟수와 앉아서 갈 수 있느냐에 좌우된다. 


최근에는 어느 장애인 단체가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당연한 권리 행사라는 의견과 시민을 볼모로 잡는 행위는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맞서는 것 같다. 어쨌든 그 시위를 벌이는 역 중에 하나가 내가 출퇴근할 때 갈아타던 곳이어서 '하마터면 힘들뻔했네'하는 이기적 상상과 함께 전에 내가 겪었던 지하철 포비아가 생각났다.  


결혼해서 신대방동이라는 곳에 살았고 직장은 압구정동이었다. 2호선을 타고 가다 교대역에서 갈아타야 하는 데, 이게 매일 치러야 하는 '큰일'이었다. 신대방역에서는 이미 사람이 꽉 차있어서 타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교대역에서는 갈아타러 이동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혼잡한 지하철 역마다 '푸시맨'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의 임무는 승객의 '안전'이 아니다. 최대한 사람들을 밀어서 욱여넣는 것이 하는 일이다. 완장을 차고 서있다가 차 문이 열리면 사람들을 객실 안으로 온 힘을 다해 밀어 넣는다. 푸시맨의 강력한 양손 파워에 등이 꺾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른 사람과 강제로 포개지는 상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내가 사고를 쳤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손발을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이 사람들 틈에서 찢겨 나갔고 그 안에 담겨있던 보온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기는커녕 허리를 숙일 수도 없는 상태라서 내동댕이 쳐진 보온병이 누구 발등을 쳤는지, 어디로 굴러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지하철 안에 서서히 퍼지는 한약 냄새로 미루어볼 때, 밟히고 채이다가 어디쯤에서 뚜껑이 열린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내릴 때까지도 끝내 그 보온병은 찾지 못하고 떠밀려 내렸다. 부지불식간에 발생한 에피소드였지만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르면 왠지 씁쓸하다. 물론 체력이나 적응력, 인내심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잘 참으며 버티어 낸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하다. 


지속되는 험난한 출퇴근길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샀다. 생애 첫 차인 현대 엑셀이라는 차였다. 창문을 내리려면 레버를 잡고 수동으로 돌려야 하고 파워스티어링이 아니라 주차하려고 핸들을 돌리려면 양손으로 잡고 힘을 써야 했다. 계열사 직원 할인이 있기는 했지만 차 값이 비싼 데다가 그런 옵션을 선택하려면 꽤 큰 금액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변변한 도로 연수를 받지 못했던 왕초보 운전자는 창문 옆으로 보이는 '집채만 한' 트럭 바퀴 탓에 입이 까끌거려서 근 일주일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하철을 더 이상 타지 않는다는 행복감에 도취해 처음에는 거리를 불문하고 악착같이 차를 이용했던 것 같다. 심지어 10분 거리의 가까운 곳에 갈 때도 차 열쇠부터 찾았다. 그 후로도 차가 몇 번 업그레이드되는 동안 오너드라이버로서 출퇴근길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물론 교통 혼잡이 지금 보다는 훨씬 덜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운전이 귀찮아지기 시작하더니 50대가 되자 체력, 집중력, 순발력같이 안전 운전에 필수적인 요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난시가 심한 데다가 노안까지 겹치니까 야간 운전이 힘들었다. 고속도로 주행 중에는 시야가 흐리고 앞 차와의 간격 파악이 어려워 80km 이상은 밟지를 못한다. 그러면 뒤 따라오던 차들이 수시로 내 차에 코를 바짝 들이대고 위협하기가 일쑤이다. 속도를 내지 못하는 내가 민폐인가 싶어서 운전보다는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아예 컨디션 최적의 상태가 아니면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 이동하는 시간이 음악이나 오디오북을 듣고, 책을 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반사적 효과도 있었다. 


그러다가 불과 몇 년 전, 다시 지하철을 타야 했고 푸시맨 시절도 잘 넘겼던 나는 급기야 대인 기피증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심각한 지하철 포비아에 시달렸다. 


경기도 안산으로 출근하던 때였다. 6호선을 타고 삼각지 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중앙역에 내려 걷거나 다시 버스를 타고 안산 시청에 도착하면 못해도 2시간이 걸린다. 왕복 하루 4시간이다. 자차를 이용하면 시간은 비슷하지만 통행료, 주유비, 주차비 등 부대 비용이 만만치 않게 발생할 뿐만 아니라 일단 체력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운전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와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따로 오피스텔을 얻어 살기에는 뭔가 어중간했다. 


3년 가까이 이런 생활을 하니까 몸이 먼저 고장 나기 시작했다. 서있어도, 운 좋게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팠다. 특히 4호선 의자는 바닥이 미끄러워서 아무리 등을 대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으려 해도 엉덩이가 미끌어나 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이어폰을 계속 꼽고 있으니 청력에 이상이 생겼고 지금 겪고 있는 이명 현상의 한 원인이 되었다. 지하철 기계 소음을 뚫고 이어폰 소소리를 들으려면 볼륨을 많이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딴 데 있었다. 사람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을 그 기간 동안 겪었다. 


사람들이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한 탓에 지하철 안은 더 비좁게 느껴졌다. 그래도 우리 집은 6호선이 순환하는 지점이어서 거의 앉아서 갈 기회가 많다. 옆에 앉은 덩치 큰 아저씨의 쩍 벌어진 다리와 어깨 압력에 밀리면서도 보던 책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젊은 남자와 여자가 내 앞에 섰다. 둘이 같은 검은색 롱패딩을 입었고 잠이 덜 깼는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고 피곤한가 보다. 얼마나 힘들겠어. 그래도 기운들 내세요. 아침 시간인데도 손잡이에 매달리다시피 몸을 지탱하는 모습이 가여워 부모 마음으로 응원했다. 다시 보던 책으로 눈을 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득 날카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김밥이었다. 그 두 사람이 은박지에 포장된 김밥을 오물오물거리며 뜯어먹고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김밥 냄새는 의외로 강력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손으로 코를 막거나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냄새를 피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이 일을 어떡하지? 내가 피해야 하나? 그럼 서서 가야 하는데? 내려서 먹으라고 한마디 할까? 그러다 시비가 붙으면 어쩌지? 결국 나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들이 빨리 김밥을 자신들의 뱃속에 밀어 넣거나 아니면 내릴 역이 다음이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사례이다. 4호선이 사당역을 지나면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지고 지하철 내부가 한산해진다. 타는 사람들의 구성도 중장년층 중심으로 바뀐다. 이때부터는 소음 공해가 심해진다. 100db 정도는 충분할 듯한 아주머니 두 분의 대화가 지하철 기계 소음과 교대로 이어폰을 뚫고 들어온다. 쉼 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30분쯤 강제로 듣고 있으면 그분들의 가족, 이웃, 친구들에 관한 라이프 스토리를 다 파악하게 된다. 그러다가 한 분이 내리면서 하는 말이 압권이다. 잘 가고 자세한 건 이따가 통화해!


이건 그냥 생각나는 한두 개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물론 지하철을 타다 보면 흔히 겪을 수 있는 이이다. 하지만 차를 타는 시간이 길다 보니 어쩌다 겪을 수 있는 한두 번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멘털의 붕괴가 온다. 제발 오늘은 조용하고 점잖은 분들과 함께 탈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매일 지하철을 타기 전에 빌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나. 


그렇게 안산에 출퇴근하던 3년 동안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상하다 보니 총체적으로 건강을 위협받았고 지하철 포비아가 생겼다. 사람들과 마주 서게 되면 흠칫 놀라게 되고 또 무슨 이상한 짓을 겪을지 두려워졌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해 갈까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이 정도면 거의 대인기피증 아닌가? 물론 푸시맨 시절만큼 체력이나 인내심이 받쳐주지 못한 탓도 있다. 


어쨌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허리는 좋지 않은 상태이고 가급적 사람이 없는 곳을 선호하고 혼잡하고 시끄러운 곳을 질색한다. 


당연히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테고, 뭘 그 정도 가지고 힘든 척이냐며 여전히 지옥철을 타느라 고생하는 많은 분들께 미안한 말이지만 요새는 다행히도 거의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일할 때도 기사가 운전해 주는 회사 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출퇴근에 불편은 없었다. 어차피 그 나라는 아직 대중교통 인프라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도 않다. 해서 지금은 개인적으로 지하철 포비아에서 해방되었다.


COVID19의 카오스가 잦아들면서 재택에서 사무실 근무로 바뀌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오늘도 힘들게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시는 모든 분들이 조금은 덜 힘들기를 바라며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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