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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앞에 막걸리 한잔?

관계의 유통 기한

by 화문화답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 하지만 그 관계의 이유와 원인 즉,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관계의 유통 기한이 달라진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이익을 전제로 한 관계 맺기가 필연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동기가 이익인 기브 앤 테이크 관계는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으면 끝나게 된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으면 연락이 뜸해지고 만나는 횟수도 줄어든다. 바쁘다고 핑계를 대 보지만, 진실은 별 볼일 없어진 상대방이 순위에서 밀려난 것뿐이다. 물론 한 번의 좋은 관계를 평생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이가 들면서 점점 줄어드는 것이 있는데 바로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이다. 울리지 않는 전화가 궁금해져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만 시간과 날짜만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다. 어쩌다 오는 전화는 십중팔구 스팸이다. 어느새 나도 잊혀 가고 있는 것이다.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게 인지상정이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턱이 닳고, 정승이 죽으면 개가 장사 지낸다고 하지 않는가.


현직에 있을 때 일이다. 협력 업체에서 가짜 상품을 납품한다는 익명의 제보가 있었다. 수입한 고가의 상품을 국내에서 추가로 가공하여 가격을 부풀려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실무 책임자였던 나는 감사팀 직원과 함께 불시에 해당 협력사로 방문 점검을 나갔다. 사장실에서 마주한 협력사 사장은 담담한 태도로 우리를 맞이했다. 오히려 붙임성 좋고 수다스러운 타입인 그 회사 영업팀장이 좀 경직된 모습이었다. 창고를 포함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봤지만 별다른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압수수색영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차피 한계는 있었다.


그런데 방문 점검을 다녀온 지 일주일쯤 지나서 협력사 사장한테 전화가 왔다. 회사 앞으로 갈 테니 잠시 만나고 싶다고, 따로 내게 할 얘기가 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만나서 얘기하겠다고 했다. 상담실이 아니고 밖에서 보자고 하는 게 신경이 쓰였다.


회사 근처 카페의 한쪽 구석 자리에 사장과 팀장이 앉아 있었다. 팀장은 다른 때와 달리 노타이 차림에 낯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얼굴이 벌겄게 달아올라있었다. 사장은 불안한 눈 빛으로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사람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김 팀장, 말씀드리지?"

"저... 사실은 그거... 제가 제보드린 사람입니다."


사장이 고개를 반쯤 돌려 힐끗 쳐다보자, 팀장이 코 끝을 몇 번 긁적이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커피 잔에 고정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며칠 만에 처음 말하는 것처럼 갈라졌다.


경쟁 업체에서도 하는 수법이라면서 팀장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가격을 높여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즉답을 피했으나 팀장은 이를 암묵적 동의로 이해했다.


팀장의 움직임을 보며 심란한 며칠을 보낸 사장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을 불러 더 이상의 작업을 중단하고 이미 만든 것이 있으면 폐기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나는 듯하던 문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작업 중단을 지시한 며칠 후였다. 노크 소리가 났는데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자, 큰 소리로 들어오라고 다시 한번 외쳤다. 팀장이었다. 책상 모서리 끝에 서서 사장이 앉아 있는 쪽으로 절반쯤 몸을 돌리고 손을 앞으로 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섰다. 평소라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세상 편한 자세로 건들거리고 있을 그였다.


"사장님, 저... 제가 돈이 좀 급하게 필요합니다."

"무슨 얘기야? 갑자기 무슨 돈?"

"생각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 회사에서 가짜를 제조한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놀란 사장이 소리쳤다.


"뭐라고? 무슨 말이야! 그건 중단하라고 했잖아?"

"폐기하기가 너무 아까워서 제가 일부를 이미 납품했습니다."


자신의 야심 찬 계획에 대해 사장이 끝내 거절하자 팀장은 크게 실망했다. 나쁜 짓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나? 경쟁사들도 그렇게 한다는데 뭐가 문제지? 사장은 요즘 들어 왜 내 말을 자꾸 무시하는 거야? 회사를 걱정해서 제안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신뢰도 잃고 기회도 잃었다고 생각했다. 10년을 함께 쌓아온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꼭꼭 누르고 있던 어두운 생각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급기야 사장에게 '빅엿'을 먹이기로 결심하고 익명의 투서 써서 보냈다.


그런데 일이 커졌다. 불시 현장 점검이 나온 걸 보고 겁이 덜컥 난 그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사장실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악마의 속삭임이 다시 한번 그를 덮쳤다. 사직서 제출 보다 돈을 요구하는 협박이 먼저였던 것이었다.


사장이 팀장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얼굴에 여드름이 숭숭한 어린 친구였다. 뭐든 시키면 그 이상을 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예뻐서 때로는 자식처럼 대했고 때로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었다. 이제는 제법 경영에 대한 개념도 생긴 것 같아 뿌듯하고 든든했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으며 긴 대화를 마쳤다. 사태 파악을 끝낸 사장은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전화를 걸었다. 이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선처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조사 결과 팀장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납품이 진행되지는 않은 것이 확인되어 그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으니 앞으로 품질 관리에 더 신경 써 달라는 당부를 했다. 만약 내가 철저하게 문제 삼았다면 그 회사는 납품이 막히게 되고 결국 도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내심 거래 중단을 예상하고 있었던 사장은 나를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상담실로. 의자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 앉은 채 양손 손바닥을 일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여러 번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정말 감사하다고, 덕분에 살았다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나중에 무덤까지 찾아가 막걸리 한 잔씩 올리겠다고...


하지만 내가 회사를 떠난 이후 더 이상 그분한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내가 무덤에 들어가면 그때 찾아오려는 걸까? 무덤 속에서 막걸리 한 잔 얻어먹을 사람이 없어져서 서운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 마음이다.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슬프다.


그러면 이렇게 합목적적 의지에 의하여 결합되고 해산되는 공식적인 관계의 종말은 그렇다 치고, 자연적 의지에 의해 형성되어 다분히 전인격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집단의 관계는 어떠할까?


유감스럽게도 학교 친구나 회사 동기 같은 사이 또한 머리가 희어지면서부터는 관계 유지가 꽤나 어려워진다. 나부터도 점점 친구 모임에 잘 나가지 않게 된다. 만나면 회장 선출 같은 서열 정하기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같은 자리에서 두세 시간을 하찮은 입담으로 보낸다.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레퍼토리가 늘 똑같다는 사실이다.


딸이 어느 학교를 다닌다거나, 아들이 어느 회사에 입사했다거나, 둘째 아이가 무슨 어려운 자격증을 땄다거나, 자식 자랑 삼매경이다.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화제는 현직 시절의 '라떼' 이야기로 넘어간다. 각자 잘 나가던 그 시절이 그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마지막으로는 앞으로 무슨 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사업 계획'을 발표한다. 거기에 몇몇이 맞장구를 치고 때로는 의기 투합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공염불이다.


이런 대화가 이어지면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고는 계속 들어주기가 힘겨워진다.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면 자칫 다 늙어서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더 이상 그 모임에 나가기가 망설여지고 그러다 보면 결국 관계가 소원해진다.


공통의 취미 생활을 전제로 하는 관계는 좀 더 어중간한 양상을 띤다. 내가 잘 나가지 않자 골프 모임인 '골골골(골 때리는 골프 골통들)'에서 제명시키겠다고 협박성(?)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사실 매번 라운딩에 참석하기에는 비용이 좀 부담스럽다. 그래서 일 년에 두 번 해외투어에만 참석하는 걸로 원칙을 정했다. 그러다 보니 단톡방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공통의 화젯거리가 적다 보니 관계도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등산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정상에 올라가면 잠시라도 세상이 발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등산이 주는 카타르시스이다. 산에 오르다 보면 줄줄이 열을 지어 오르는 동호회 일행과 맞닥뜨리거나, 등산로 입구에서 동그랗게 모여 서서 준비 운동을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게 부러워서 산악회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성 회원 두 명이 합류하면서부터 '관계'에 심각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여성 회원 두 명을 두고 남성 회원 십여 명이 앞다투어 벌이는 어이없는 행태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그 관계의 종말을 택했다. 그 이후에는 그냥 원래대로 혼자서 산행을 한다. 세상 뱃속 편하다.


보행에서 자유로운 손과 다른 사람과 힘을 합칠 수 있는 관계 성립은 인류 문명 발달의 근간이었다. 누구도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종국적으로 모든 관계는 결국 유한하다. 중요한 점은 좋은 관계를 만들고 최대한 오래 지속시키는 것과, 반대로 좋지 않은 관계는 그 인연의 끈을 속히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인생을 좋은 흐름으로 가져갈 수 있다.


다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나이가 들고 그럴만한 때가 되어서 상황을 주관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한창 사회성이 중요하고 커넥트에 치중해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불편한 사람과의 관계 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 그래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뒤통수를 가격 당하는 일이 없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이다.


좋은 인연,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유통 기한을 늘리고 또 종말을 맞이하는 일은 매우 까다롭고 어렵다. 그렇다고 끝까지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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