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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문화답 Sep 21. 2023

뻐꾸기의 노래가

새벽 5시에 울리네

"뻐꾹뻐꾹 뻐꾸기의 노래가

뻐꾹뻐꾹 은은하게 들리네.

뻐꾹뻐꾹 아름다운 노래가

뻐꾹뻐꾹 가냘프게 들리네."


스웨덴의 요나손이 작곡한 '뻐꾸기 왈츠'라는 경쾌한 리듬의 동요이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 멜로디가 새벽 5시에 아파트 단지에 울려 퍼진다면 어떨까?


내가 사는 집은 북한산 자락에 있는 조용하고 쾌적한 아파트이다. 병풍처럼 북한산 배경을 두르고 있다. 푸름을 가득 머금고 있는 나무들, 머리를 내밀고 햇빛을 맞는 커다란 바위들, 산이 뱉어내는 듯 산마루 위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창공을 둥글게 맴도는 솔개, 산들바람에 몸을 부대끼며 춤추는 나뭇잎들, 촉촉하게 비에 젖은 풍경,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설경을 볼 수 있다. 처음 집 보러 왔을 때 창 밖에 펼쳐진 북한산 정취를 보고 한눈에 반했었다. 서울 시내에 이만한 뷰를 가진 아파트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우리 아파트 역시 재개발 지역에 건축한 곳이라 북한산 뷰 반대 방향에는 아파트 뷰가 존재한다. 우리 집은 고층이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린이 놀이터와 문고, 노인정 시설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고, 그것들을 중심으로  아파트 건물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건너편으로 다른 동 아파트가 그리 멀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이런 배치는 일종의 굴뚝 효과를 내기 때문에 아래에서 나는 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위로 올라온다. 저녁 무렵이면 놀이터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어떤 때는 목청 큰 아저씨가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느닷없는 재채기 소리가 메아리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이런 소음은 낮에 또는 초저녁 시간에 들리기 때문에 그러려니 한다. 인용 의무가  있는 생활 소음이라고 생각해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뻐꾸기 한 마리가 나타났다. 뻐꾸기 소리는 새벽 5시를 전후해서 여지없이 잠을 깨운다. 마치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깨우기를 명 받은 알람이라도 되는 듯 거침없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출발한 왕복 2차선 도로는 내가 사는 동 앞에 이르러 주차장 입구로 이어지면서 끝이 난다. 주차장 입구 앞에서 왼쪽으로 보행로가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10미터쯤 올라가면 노인정이 있다.  그 앞에서 다시 양 갈래 길이 나오고, 거기서 우회전을 하면 10미터쯤 앞에 3**2동 입구인 막다른 길이다. 좌회전을 하면 20미터쯤 앞에 어린이 놀이터와 3**4동, 3**5동 입구가 차례로 나온다. 역시 막다른 길이다.


이 길은 차도라기보다는 보행로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차선이 그려져 있지도 않고 아스콘 포장이 되어 있지도 않다. 그냥 시멘트 또는 보도블록으로 포장되어 있다. 굳이 차가 들어온다고 해도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너비밖에 되지 않는다.


이 보행로에 택배 차량이 들어온다. 왕복 2차선 도로에 차를 대고 작은 수레 같은 것에 짐을 실어서 3**4동이나 3**5동 입구까지 옮긴다 해도 이동 거리는 기껏해야 30~40미터 정도이다. 그러나 택배 기사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파트 입구 코앞까지 차를 들이대고, 물건을 내리고, 차를 돌릴 수 없으니까 후진을 해서 나간다.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T 코스처럼 정차했던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놀이터와 노인정을 후진으로 지난 다음, 좌회전해서 다시 도로로 나간다.


이 과정에서 뻐꾸기가 출현한다. 트럭이 후진할 때 사람들한테 경고를 하는 알림 음이다. 보통 다른 트럭은 '삑, 삑, 삑'하는 소리가 나는데 유독 이 택배 트럭의 알림음은 뻐꾸기 왈츠 멜로디이다.


"뻐꾹뻐꾹 뻐꾸기의 노래가

뻐꾹뻐꾹 은은하게 들리네.

뻐꾹뻐꾹 아름다운 노래가

뻐꾹뻐꾹 가냘프게 들리네.."


이 멜로디가 한바탕 울려 퍼지고 나면 방향을 잡은 트럭이 붕 하고 떠나버린다. 골목길에 채소 트럭이 지나가면서 '배추 있어요. 감자 있어요.' 하는 녹음을 틀어 놓았을 때 하고 거의 비슷한 크기로 들린다. 그리고는 다른 동에서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는지 이번에는 어렴풋이 뻐꾸기가 운다. 소리의 크기는 절반 정도로 줄었지만 이곳저곳을 그렇게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제 할 일을 다 마친 뻐꾸기 트럭이 떠나고 나면 다시 새벽의 고요가 찾아온다. 하지만 이미 십 리 밖으로 달아나 버린 잠을 다시 붙들기는 여의치가 않다.


시간이 돈이고 최대한 동선을 줄여야 하는 택배의 직업적인 필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필요성 때문에 아파트 단지 주민의 새벽잠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강제로 잠을 깨는 사람의 수가 다수가 아니고 소수라도 말이다. 어떤 아파트 단지는 안전상의 이유로 택배 차량의 출입을 아예 통제하고 나서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출입을 아예 막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배려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조금 번거롭겠지만, 새벽 시간에는 30~40미터 정도만 손수레를 이용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고민하다가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다. 물론 어떤 속 시원한 해결책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나마 믿을 데라고는 거기밖에 없으니 시도는 해봐야 했다.


"안녕하세요? 3**2동 주민입니다."

"네."

"부탁할 것이 있어서요."

"민원 넣으시는 거예요?"


민원이라. 낮은 톤에 느릿한 말투의 여자분과 나는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민원이라는 단어를 특정함으로써 국면을 방어적으로 전환하고, 반격하기 위해 날을 세우려는 걸까? 순간적으로 전화를 건 내 쪽이 어쩐지 가해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분위기가 무거웠지만, 기왕 전화한 거니까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으신 분은 '위치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또는 '그런데요.' 같은 말을 중간마다 반복했다. 그러다가 새벽 배송을 원하는 주민도 있는 거 아니냐고 되묻는 부분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떤 불편 부당한 일이 있어도 누군가 그걸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당화된다는 말인가? 


마지막으로 새벽 시간 만이라도 택배 트럭들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막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도대체 되고 안되고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어쩌면 이것도 내 이기적인 생각인지도 모른다. 새벽뿐만 아니라 낮에도 노인정과 놀이터 근처를 트럭이 들락거리는 것은 누가 봐도 위험한 상황이니까.


예상대로 이 대화는 의미도 없고 불편했고 불필요했다. 관리사무소의 업무 중에 가장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뤄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관리비를 징수하고 무슨 용역업체 재계약에 동의하라고 서류를 디미는 것? 그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 주민의 안전과 편익을 보호해 주는 것? 


처음에 이사 왔을 때만 하더라도 천정에 등이 나가거나 하면 이른 시일 안에 교체해 주었다. 전화 한 통화면 그야말로 신속 친절한 서비스였다.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이지만 내가 심한 똥 손이라서 보통 남자분들이 잘하시는 전기 기구를 만진다든지 수전을 수리한다든지 하는 일들을 잘하지 못한다. 고맙다고 음료수나 담뱃값을 건네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털털하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소소한 부탁 정도는 관리사무소 차원에서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공동 업무에 바빠서 시간이 없으니 사람을 불러서 수리하라는 것이다. 정서가 그렇게 바뀌는 것인지, 아니면 경비 절감 차원에서 인력을 줄이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동 주택이나 아파트 관리사무소라는 개념이 무색해지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관리사무소에서 '민원 전화' 받으신 분께서 내놓은 대책은 두 가지였다. 첫째, 윗분께 말씀드려 보겠다. 둘째, 새벽 시간 근무자한테 출입하는 배송 트럭 기사들에게 주의를 주라고 하겠다. 새벽에 들락거리는 트럭이 한두 대가 아닐 텐데 들어오는 차마다 상황 설명을 하고 협조를 당부한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조치는 이렇다. 첫째, 가능하다면 차로가 아닌 보행로나 특히 어린이 놀이터, 노인정 근처에는 차량 진입을 막는 것이다. 둘째, 이게 어렵다면 대부분의 주민이 단잠을 자는 새벽 시간 만이라도 뻐꾸기 왈츠가 들리지 않도록 즉, 트럭이 아파트 입구 코앞까지 오지 못하도록 임시 차단 시설이나 협조 안내문을 부착하는 것이다. 


그래. 그래도 대책을 두 가지씩이나 말씀해 주셨는데 이 정도에서 멈추자. 어차피 더 이상은 얘기해 봐야 각자의 생각과 입장을 반복할 뿐이다. 결국, 나만 까탈스러운 민원 제기 주민이 되는 것이다. 귀찮게 해 드려서 미안하다고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며칠 이후부터는 오히려 뻐꾸기 트럭의 이동 속도가 더 빨라졌다. 후진의 스피드를 높여서 그야말로 바람처럼 휙휙 뻐꾸기 왈츠를 날리고는 달아나 버린다. 아마 무슨 이야기를 듣긴 들은 모양이다. 감탄할 만한 적응력이다.


가장 깊어야 할 새벽의 고요여! 나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싶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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