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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문화답 Dec 12. 2023

가버린 친구에게

친구가 그리운 날

친구 '열빵'이 남겨준 행운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에게도 나의 이름은 한참을 생각해야 할 만큼 아득해져 있을 것이다. 그는 쇳소리 나는 목소리에 조금은 과장된 몸짓으로, 무심한 듯 성기게 행동했고 매사에 쉽게 흥분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열빵'이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던 날은 서브프라임모기지((subprime mortgage) 사태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 경제를 강타하고 있을 때였다. 많은 사람 뇌리에 리만브라더스 파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나비 효과였다. 아침에 시작한 대책회의가 점심시간이 넘었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회의실 안을 무거운 공기가 짓누르고 있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사람, 검지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사람,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는 사람... 그들의 고뇌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엎어 놓았던 핸드폰을 드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돈 좀 보내줘."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나중에 다시 연락이 오겠지. 거두절미한 그의 문자메시지는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대로 잊혔다.  이유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이후, 서로에게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세월의 강 가로 놓이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내 기억 속에서 소환한 것은 TV 뉴스를 보던 아내였다.     

     

"금값이 비싸다는 데 있는 거 모아서 팔아볼까?"     

     

이번 기회에 굴러다니는 것들 모아서 현금으로 바꾸겠다는 의도는 알겠지만, 돈이 급한 것도 아닌데 굳이 팔 거까지는 없지 않나? 하지만 더 말을 섞어봐야 어차피 본인 마음대로 할 게 뻔하다.      

     

"그래, 알아서 해."    


동네 쇼핑센터에 있는 금은방에 다녀온 아내는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아내는 서랍을 뒤져서 목걸이 하나를 더 찾아내었다. 해외명품 브랜드 디자인을 흉내 낸, 커다란 둥근 메달이 달린 것이었다. 그 목걸이는 내가 젊었을 때 한동안 걸고 다니기는 했지만, 이후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거 보나 마나 도금한 거야. 물어보지도 마."     

"무슨 소리야,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설마 내가 도금한 이미테이션을 걸고 다니지는 않았을 거라는 판단이 전제된 것이었을까? 목걸이를 들고나갔던 아내가 이번에는 지난번의 두 배 가까이 되는 돈을 들고 의기양양해 돌아왔다. 아무래도 펜던트 크기가 있어 중량이 꽤 나갔던 모양이다. 그때 당시 3.75g에 4만 원 정도였던 금값이 지금은 30만 원이 넘으니 진짜 금이었다면 그럴만하다.         


근데 아내에게 느닷없이 현금 선물을 안겨준 그 목걸이가 어디서 났더라? 언뜻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산 건 분명히 아니고, 누구한테 선물로 받은 것 같은데. 머리를 쥐어짜다가 번쩍하고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열빵, 그 친구였다. 당시 종로 귀금속 업체에서 일하던 그가 공장에서 방금 나온 '명품 비슷한 신상'이라며 자신의 '기술력'을 자랑할 겸 내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진짜 14K 골드였다고? 어찌 그런 일이.


그를 생각하면 스키장이 먼저 떠오른다. 나를 스키장에 데리고 다니며 스키 강사 역할을 자처했다. 종일 내 옆에 붙어서 스키를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키장에서 발생이 우려되는 각종 위험으로부터 초보자인 나를 보호해 주려고 애썼다. 

     

내가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을 무렵 그는 종로의 귀금속 매장 하나를 본인 명의로 인수했으나, 내가 다시 서울로 발령받았을 즈음에는 매출 부진으로 문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친상을 당해 여동생과 둘이 남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


그가 을 보내달라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는 종로에 있는 작은 귀금속 매장에서 판매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즈음 중국에 게임 도박장 운영을 계획하는 선배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같이 중국으로 건너갈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찾아봤지만 011로 시작하는 번호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었다. 여태 중국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고, 여건상 본업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웠을 텐데. 그때 바로 돈을 보내주지 못한 것이 많이 후회된다. 지금처럼 모바일로 간단히 송금할 수 있었다면 바로 보내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미련한 놈. 답이 없으면 한 번만 더 전화할 것이지.


이제 그 친구가 들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일단 은행에 들러 송금부터 해주었어야 했다. 친구야, 미안해. 몸 건강하게, 너무 힘들지 않게, 잘 지내고 있길 바라. 가끔은 친구가 나에게 남겨준 목걸이처럼 예상치 못한 행운도 함께 하기를 기원할게.

     


나무가 친구라던 친구


볕이 좋은 날에는 캠퍼스 잔디 위에서, 마음이 울적한 날에는 학교 앞 막걸리 집에서 같이 놀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 없다. 그가 떠난 지 벌써 수년이 지나가고 있다. 


늘 어울려 다니던 대학 시절 5인방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다. 충청남도 홍성이 고향이고, 구부정한 큰 키에 서글서글한 성격을 가졌다. 나에게 담배를 억지로 가르쳐 주었고 나랑은 '전투 바둑' 맞수이기도 했다. 군대를 나보다 일찍 간 그는 휴가를 나올 때마다 주먹이 다 까져서 오곤 했다.


졸업하고 나는 H그룹에, 그는 ㅇㅇ은행에 입사했다. 하지만 평소에도 독특한 사고방식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개똥 철학자는 얼마 되지 않아 은행을 퇴직하고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오픈했다. 그가 은행에 다닐 때 아내의 직장 동료를 소개하여 둘은 결혼에 골인하였고, 그리하여 부부끼리도 친한 사이로 지냈다.


어느 해였던가 연말 모임에 나온 그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입이 돌아가 있었다. 말도 잘 못하고 술은커녕 음식을 먹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과도한 스트레스 탓에 구안와사가 왔으며,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 곧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들을 안심시켰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복덕방이 그렇게 힘드냐고, 쉬엄쉬엄 하라고 타박을 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친구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병원에서 정밀 검사한 결과 구안와사가 아니라 이하선암이며 이미 다른 곳에 전이가 일어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구안와사라고 진단했던 병원의 명백한 오진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가을 끝자락 무렵 그 친구가 회사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식사를 같이 하고 싶었으나 일반적인 음식을 먹지 못한다 하여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항암치료 때문에 몸은 마르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필수적으로 쓰고 다니던 때여서 친구도 나도 마스크를 썼다. 친구는 말을 하는 중간마다 계속해서 마른기침을 했다.


오진에 대한 의료 소송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너무나 화가 나서 나라도 도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을 그렇게 쓰고 싶지 않다며 본인이 죽은 다음 와이프가 결정해서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나가 버린 시간에 '만약에'를 부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 조금만 일찍 발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집 근처에 있는 산에 산책을 다니며 소일을 하는데 그 길 끝에 가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나무 친구가 있다고 했다. 힘들어 보였고, 외로워 보였다.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아쉬울까.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얘기를 들어주었다. 언젠가 학교 앞 주점에 가서 고갈비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외롭지 않게 살아.' 그날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렇게 바람처럼 휑하니 다녀간 얼마 후, 호스피스병원에서 통증으로 힘들어하다가 눈을 감았다. 온 세상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 장례식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언제나처럼 밝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이 나를 맞았다. 억장이 무너져 내려 볼 수가 없었다. 사진 속의 그는 입이 돌아가 있지 않아 편안해 보였다. 내 아내의 친구이자 그 친구의 아내는, 보고 싶은 사람 다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고 나서 떠났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왔던 날, 그의 얘기를 더 들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그와 조금 더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백세까지 살 거라고 야단들인데, 그렇게 빨리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다니. 뒷산에 있는 나무가 친구라던 그의 절절한 외로움이 아직도 짙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그래 친구야 외롭지 않게 살게. 그리고 나 지금 기타 배우고 있어. 너한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거든. 우리 가끔 캠퍼스 잔디밭에서 어깨 동무하고 같이 부르던 노래야. 거기서 들어줄 거지?


"하얀 날개를 휘저으며

구름 사이로 떠오르네

떠나가버린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사라져 버린 그 사람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

떠나갔다네


한없이 넓은 가슴으로

온 세상을 사랑하다

날리는 낙엽 따라서

떠나가 버렸네


울어봐도 오질 않네

불러봐도 대답 없네

흙 속에서 영원히

잠이 들었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휘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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