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자승스님의 사망 소식을 저녁 뉴스가 전하고 있다. 그분의 죽음과 관련해서 불교계에서는 소신공양했다고 발표했지만 몇 가지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다. 더욱이 그 장소가 경기도 안성에 있는 칠장사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칠장사는 636년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데 기록은 없고, 1014년 고려 현종 때 혜소국사가 중건함으로써 불교 국가였던 고려의 주요 사찰로 거듭났다고 한다. 칠장사(七長寺)라는 이름도 혜소국사와 관련이 있다. 7명의 도적이 혜소국사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고, 마침내 도를 깨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궁예가 정치적 소용돌이를 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이야기와 어사 박문수의 과거 급제 일화 등 굵직한 스토리가 머물러 있는 천 년 고찰이다.
고승의 돌연한 죽음도 그러려니와 하마터면 귀한 문화재들이 불탈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험한 일들이 터지는 현실에 마음이 흉흉하다. 퇴근길 교차로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위급을 알리는 119 구조대 차량의 사이렌 소리에도, 기어이 먼저 가려고 길을 막는 차들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떤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 그 순간에도,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멈추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길은 그렇게 매번 한순간, 한 공간에 존재한다.
심란한 마음으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때 충전기에 꽂아 놓았던 휴대폰이 어둠 속에서 빛을 냈다. 메시지가 온 것이다. 평소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가 어려워서 밤 10시 이후에는 착신 금지를 걸어 놓았는데 대체 이 시간에 누구야! 일어나 보니 9시 55분이었다.
'사람들은 왜 쉽게 생을 포기하려 할까요?'
불을 켜고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무시무시한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서은지(가명, 이하 같음), 퇴직하기 전에 근무하던 회사의 신사업팀 과장이었다. 나를 많이 따랐고, 좋은 애티튜드를 가졌다. 업무 역량이 다소 부족하였으나 배우려는 자세와 수용력이 높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가 느닷없이 던진 이 한 문장은 이날 밤 나를 깊은 상념의 늪에 빠뜨렸다. 내가 무슨 고승이나 현자도 아닌데 그는 왜 나에게 이런 어려운 질문을 했을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문장의 뉘앙스로 볼 때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안부를 확인해야 했다. 서은지는 팬데믹이 끝나고 본인이 좋아하던 여행사 일을 하기 위해 이직하였으며, 아직 외국에서 일하고 있다.
신호가 길게 갔지만 받지 않았다. 한 번을 더 걸었으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친구는 지금 외국에 있고 나는 그의 주변 사람들 연락처를 알지 못한다. 한국 경찰에 신고해서 국제 공조를? 턱도 없는 소리이다. 그렇다면 그 나라에 있는 내 지인에게 연락해서 그 나라 경찰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 전화번호를 뒤지려던 순간, 메시지가 도착했다.
"뜬금없는 말씀을 드려 죄송해요. 저도 어려운 가정에 태어나 국가보조금과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녔거든요. 살다 보면 힘든 일도 생기고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사람들이 참 쉽게 사는 걸 포기하는 거 같아요. 아니면 세상이 그만큼 더 힘들어진 걸까요? 취준생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오늘 또 다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나 편하게 내 인생 산다고 제가 주변을 살피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하게 돼요. 지혜로운 분께 한번 여쭤보고 싶었어요. 삶을 포기하려고 할 만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누구 이야기일까. 친구 이야기가 맞기는 한 걸까? 어쨌든 현재 서은지가 맞닥뜨린 절망감은 가볍지 않다. 요즘 일이 힘들었나? 회사가 어려워진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전화를 받지 않았던 걸 보면 통화를 원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잠은 이미 십 리 밖으로 달아났다.
"은지야, 괜찮니?"
"네, 괜찮아요."
"별일 없는 거지?"
"네."
"할 얘기 있으면 해도 괜찮아."
"아니에요. 그냥 생각은 많은데 마땅히 물어볼 데가 없어서요."
"놀랐어."
"죄송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다행히 본인이 당사자는 아니었고, 친구 일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내가 지혜로운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노트북을 열고 '은지에게'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썼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도 위안이 될 수 없을 거야. 소중한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의 심정을 누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어. 태산보다 무겁고, 악몽처럼 무서웠을 고통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거야. 오히려 섣불리 보탠 몇 마디 말이 더 큰 아픔을 주게 될지도 몰라. 그냥 그 마음 한구석에 돌덩이처럼 매달려 있을 그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여주면 어떨까.
그러다가 혹시 기회가 된다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봐. 남을 보지 말고 나를 보라고.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깨우치게 되거든. 결국, 인생은 혼자라는 것.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 바로 나 자신이야.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자신을 토닥여주는 삶의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 '괜찮아, 잘했어. 다 괜찮아질 거야.' 하면서 말이지.
은지가 지금 30대 중반이지? 나도 그 나이 때에는 '어떻게 하면 잘 살까'하는 고민을 치열하게 했어. 그러다 이제는 나이가 드니까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아지네. 사람은 누구나 죽지. 어차피 죽어. 그리고 인생은 너무 짧아.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은 열심히 살아봐야지.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소리냐고? 그래도 버티면 살게 돼. 맞아. 나도 지나온 인생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살아지는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아. 몇 가닥 추억을 붙잡고 살아지는 것이고, 나만의 소박한 꿈을 꾸며 살아지는 것이고, 누군가의 소중한 사랑에 의지해 살아지는 거지. 큰 풍랑을 이기는 것은 큰 배가 아니라 작은 이파리라고 해. 작은 이파리는 파도에 실려 갈 뿐, 엎어지거나 침몰하지 않아. 그렇게 파도를 넘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스스로 찾아올지도 몰라. 정말 마법처럼 다가오는 그런 날, 그런 순간 말이야."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질문이라서 아주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전하기는 했지만 나도 여전히 모른다. 삶의 길,죽음의 길이 무엇인가를. 무거운 상념에서 빠져나와, 이메일을 전송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다 마주치는 모든 일에는 해피엔딩도 있고 새드엔딩도 있다. 일승일패가 늘 벌어지는 병가지상사처럼 말이다. 나는언제부터인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기를 기대한다. 내 인생도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은지도, 그리고 은지가 앞으로 더 살피겠다고 다짐하는 주변 사람들도 힘든 순간을 잘 넘어서 그들 인생의 마지막 결론은 해피엔딩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