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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림 Nov 23. 2016

우리는 살아있는가

김승옥 <역사>

우리는 살아있는가.

 

 

카프카는 <변신>에서 샐러리맨을 벌레로 변신시키더니 기어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도 가족들의 방치에 의해. 가족들은 벌레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로워 한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자, 벌레로 전락해버리는 자본주의의 이면에 대한 섬뜩한 풍자였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서울’은 어찌 보면 섬뜩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비춰진다. <서울 1964년 겨울>의 주인공은 버스 뒤 칸에 앉은 여자 아랫배의 꿈틀거림을 보고 편안함을 느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역사의 주인공은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라는 낙서, 동대문에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서씨, 창신동 빈민가 저녁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이 속에서 살아있음과 자기 존재를 느낀다. 물론, 그 살아있음은 자기 존재를 모두 다 잃어버린 마지막 발악이다. 모든 재부가 바코드로 변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지위 따위로 변해버려 그 사람 자체의 의미는 찾기가 힘들어 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번듯한 양옥집의 삶을 동경했지만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 창신동을 오히려 그리워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곳에 갈 생각이 없다.

 

역사 당사자로 보이는 서 씨는 혈통 있는 장사이다. 그러나 그는 혈통, 전통 따위와 상관없는 노가다 삶으로 싸구려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 그는 스스로의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밤에 동대문에서 무거운 돌을 들어올린다. 왜 사람이 없는 야심한 밤일까. 대 낮에 살아있음을 느끼면 모두의 손가락질과 형사 처분 같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니까. 즉, 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낮에는 죽어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주인공도 동대문의 밤이 좋다고 했다.) 밤이 되어야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깨어나는 사람들. 김승옥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근대화의 상징, 서울을 그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액자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서 씨에 대한 이야기가 다가 아닌 것이었다. 이 구성의 의미를 마지막에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나’의 대답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젊은이의 “어느 쪽이 틀려 있었을까요?”라는 질문에 ‘나’는 “글쎄요”라고 하며 다만, 그 젊은이가 보았다는 두 생활이 사실 내 바로 곁에 공존(共存)하고 있다고 하면 나도 좀 멍청해져 버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느낌뿐이었다고 기술한다. 보리차에 흥분제를 탔지만 끄떡없는 세계.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는 세계. 그냥 그런 마음. 어찌할 수 없이 멍청하게 살아야만 하는 아쉬움, 안타까움, 슬픔 같은 것이 전해지는 듯하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살아가고 있나, 살아지고 있나.

언제 살아 숨 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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