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요즘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 성과도 나쁘지 않고, 상사의 평가도 긍정적이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무겁다. 그의 고민은 다음과 같다.
“일을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내 인생의 방향과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산업 심리학은 오랫동안 사람과 일의 적합성(Person–Job Fit, 이하 P–J fit)을 중요하게 다뤄왔다. 하지만 최근 영국 사우스햄튼 비즈니스 스쿨(Southampton Business School)의 William E. Donald 교수 등은 기존의 관점을 넘어, 사람과 직무의 적합성이 아니라 사람과 경력의 지속적 조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Talluri, S. B., Baruch, Y., & Donald, W. E. (2025). Navigating sustainable careers: A conceptual framework on person-career fit dynamics. Journal of Vocational Behavior, 104157.).
바로 주관적 사람–경력 적합성(Subjective Person–Career Fit, 이하 P–C fit)이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직무 적합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재조정되는 관계다.
P–J fit은 간단히 말해 “이 사람이 이 일에 맞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개인의 능력(abilities)과 직무가 요구하는 수준(demands)이 잘 맞으면 ‘요구–능력 적합(demand–abilities fit)’, 직무가 개인의 욕구(needs)를 충족시켜주면 ‘욕구–공급 적합(needs–supplies fit)’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신입사원 선발이나 직무 배치, 초기 적응과 같은 조직 초기단계에서 매우 유용하다.
연구에 따르면 P–J fit은 초기의 직무 만족, 성과, 몰입 등과 높은 상관을 보인다. 특히 채용이나 평가에서 적합한 사람을 찾는 기준으로 명확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무적 현실성이 높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 적합감은 종종 변한다. 직무가 변하고, 조직의 문화나 구조가 바뀌며, 개인의 가치관과 정체성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즉, P–J fit은 현재 시점의 정태적(static) 적합에는 강하지만, 장기적인 지속가능성(dynamic sustainability)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 개념은 '지금 이 일이 나에게 맞는가?'에는 대답할 수 있지만, '앞으로도 나와 맞을까?'라는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Donald 교수 등은 경력(career)이라는 더 큰 틀로 시선을 옮긴다. 그들에게 경력은 단일 직무나 직책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고 적응하며 발전하는 삶의 경로(pathway)다. 따라서 진정한 적합성은 현재의 일과 나의 능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와 내 경력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며 함께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들은 주관적(person’s own sense) 적합감을 핵심으로 본다. 즉, 객관적인 매칭 점수가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경력이 스스로 맞다고 느끼는 인지적·정서적 감각이 핵심이다.
1. 개인 요인(personal factors) — 개인의 가치, 흥미, 자기효능감, 성장지향성 등.
2. 경력 환경(career environment) — 조직의 문화, 경력기회, 사회적 제도, 산업 맥락 등.
3. 주관적 적합감(subjective fit) — 개인이 느끼는 경력과의 일치감(harmony).
이 3요소가 상호작용하며, 그 결과가 지속가능한 경력(sustainable career outcomes), 즉 건강(health), 생산성(productivity), 행복(happiness)을 결정한다. Donald 교수 등은 특히, 적합감이 떨어질 때 사람들은 경력 크래프팅(career crafting)이라는 조정 행동을 통해 균형을 회복한다고 보았다. 이는 경력을 스스로 재설계하거나, 자신의 일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는 과정이다. 즉, P–C fit은 고정된 매칭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조화를 회복하는 능력이다.
이 두 개념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용되는 시점과 기능이 다르다. P–J fit은 주로 입문기나 초기 적응 단계에서 효과적이다. 역량과 직무요구가 잘 맞을수록 빠르게 성과를 내고, 조직에 대한 몰입도 높아진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이 적합성이 약화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가치관, 경력 목표, 삶의 우선순위가 변하기 때문이다.
반면, P–C fit은 경력 중기 이후에 더 현실적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일을 잘하느냐보다 일이 내 인생의 방향과 맞느냐를 고민한다. 따라서 P–C fit은 의미감과 자기성장, 정체성 일치감을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몰입(sustainable engagement)을 만들어낸다.
요약하자면, P–J fit이 조기 적응(early adaptation)을 돕는 개념이라면, P–C fit은 장기 지속(long-term sustainability)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다.
P–J fit이 작동하는 방식은 주로 효능감과 안정감이다. '나는 이 일을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동기를 강화하고, 초기 성과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동기는 성과 중심이기 때문에, 성장의 의미나 내적 동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쉽게 소진될 수 있다.
반면 P–C fit은 정체성과 의미의 수준에서 작동한다. '이 일은 나의 가치관과 경력 방향과 맞는다'는 인식은 자기통합감을 높이고, 경력 전체를 하나의 내러티브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적 확신(meaning assurance) 을 얻고, 어려운 시기에도 회복탄력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결국 P–J fit은 성과의 엔진이고, P–C fit은 경력의 연료탱크다. 둘 다 필요하지만, 시점과 기능이 다르다.
마크 테토(Mark Tetto)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Goldman Sachs)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월가에서 잘나가던 마크테토, `대한외국인` 된 사연,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society/9826239). 그는 금융 데이터 분석과 투자 포트폴리오 관리 분야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성과를 냈다. 철저한 분석력과 전략적 사고, 완벽주의적 일 처리 덕분에 ‘이 일에 매우 잘 맞는 사람’, 즉 높은 P–J fit을 가진 인재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다른 종류의 불일치를 느끼기 시작했다. 탁월한 직무 수행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목적과 자신의 가치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 자신이 다루는 숫자들은 거대하지만, 그 숫자 뒤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인식이 점점 강해졌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회상한다. 결국 그는 안정적인 커리어를 내려놓고, 맥킨지 컨설팅을 거쳐 한국으로 건너와 삼성전자에 입사해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그는 투자 전문가이자, 문화 해설자,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완전히 다른 형태의 경력을 만들었다. 처음엔 이질적인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는 이 전환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가치·정체성과 경력의 방향이 일치하는 경험, 즉 높은 P–C fit을 얻었다. 그에게 일은 더 이상 직무가 아니라, 정체성을 실현하는 무대가 되었다.
마크 테토의 사례는 완벽하게 수행 가능한 일(P–J fit)이라 해도, 그것이 자신의 가치와 방향(P–C fit)에 맞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반대로, 직무 자체는 낯설고 불확실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가 연결되는 순간, 경력은 오히려 더 지속가능해질 수 있다.
주관적 P-C fit은 가치·정체성 일치 (Alignment Fit, 개인의 가치·정체성과 경력의 방향 간 일치), 성장·의미 지향 (Growth Fit, 경력을 통한 개인적 의미·성장 가능성), 조화·조정 능력 (Adaptive Fit,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력–자아 간 조화를 유지·조정하는 능력)과 같은 요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히 직무 만족이나 성과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경력을 어떻게 인식하고, 변화 속에서 얼마나 조화를 유지하는지를 탐색한다.
이제 fit은 더 이상 채용의 문제만이 아니다. 경력의 심리적 지속가능성을 다루는 새로운 연구 주제이자, HR 실무의 새로운 기준이다. P–J fit이 정태적 매칭의 개념이었다면, P–C fit은 시간 속에서 진화하는 동태적 조화(dynamic alignment)로 확장된다. P–J fit은 일의 시작을 결정하고, P–C fit은 일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 경력의 지속가능성은 초반 매칭에서 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일과 내가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는 경험이 진짜 fit에 가깝다.
“We don’t find the perfect fit. We build it—over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