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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릿(GRIT)에 열광하지 마라

by 박진우

수년 전부터 HR과 교육 현장에 하나의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하고 있다. 바로 그릿(grit)이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 끝까지 버티는 힘, 어려워도 물러서지 않는 근성. 이 말은 한국 사회가 오래도록 이상화해온 성공 공식과 기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그릿이 가장 인기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다.


“재능보다 중요한 건 그릿이다.”
“성공한 사람은 결국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문장은 듣기만 해도 힘이 난다. 우리가 실패한 이유가 능력이 아니라 끈기 부족이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노력만 보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고, 시스템은 그대로 둔 채 개인적 해결책만으로도 삶이 달라질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연구는 그릿이 대중이 생각하는 것처럼 강력한 특성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릿은 분명 성취와 약한 상관관계가 있지만, 기존 심리 변인의 조합을 새로운 포장지에 담아낸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릿에 열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끈기는 도덕적 미덕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버티는 사람’은 자동으로 성숙하고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그릿은 심리학 개념이지만 동시에 사회가 선호하는 도덕적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단어가 실제로 조직에서, 학교에서, 개인의 삶에서 어떤 오해를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끈기는 성취를 예측하지만, 대부분 다른 요인의 재포장이다


그릿 연구를 둘러싼 대규모 메타분석(Credé et al., 2017)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릿은 성취를 예측하긴 하지만, 기존 변수와 비교했을 때 추가로 설명해주는 비율은 1%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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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redé, M., Tynan, M. C., & Harms, P. D. (2017). Much ado about grit: A meta-analytic synthesis of the grit literatur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13(3), 492.


흥미로운 점은 그릿을 구성하는 두 요소 중 ‘흥미의 지속성(Consistency of Intereset)’은 예측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성취와 의미 있게 연관된 부분은 '노력의 지속성(Perseverance of Effort)'인데, 이는 대부분 성실성(Conscientiousness)과 같은 기존 심리 변수들이 이미 설명하고 있던 영역이었다.


그릿은 혁신적 개념이라기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의 묶음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개념에 더 쉽게 반응한다. ‘성실성’은 지루하지만, ‘그릿’은 간결하고, 이야기로 만들기 좋으며, 무엇보다 '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과대평가되기 좋다.


문제는 그릿 자체보다, 그릿을 신화처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조직에서 그릿이 과도하게 강조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부작용은 문제를 개인의 의지로 환원하는 현상이다. 성과가 떨어져도, 구조가 비효율적이어도, 리소스가 부족해도, '조금만 더 버텨라', '넌 끈기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너무 쉽게 등장한다. 이는 다운스트림 문제(개인)에 포커스를 두고, 업스트림 문제(구조)를 가린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전략적 포기의 어려움이다. 사람은 때로 실패하거나 멈추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릿 담론은 사람들에게 묘한 압박을 준다. 포기하면 도덕적 실패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가치가 낮은 과제에도 매몰되고,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도 '끝까지 가보자'라는 이상한 의무감이 작동한다. 이른바 ‘성실성 편향(sunk cost fallacy)’이다. 버티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고, 목적은 사라진다.


이것은 개인의 심리 건강에도 영향을 준다. 맞지 않는 일을 계속 버텼을 때 나타나는 것은 성장이나 성취가 아니라, 자기비난과 냉소, 무기력감이다. '내가 끈기가 없어서 실패했다'라는 식의 자기 해석은 학습 기회를 제한할 뿐이다.


끈기보다 중요한 것은 ‘전략적 지속성’이다


최근의 조직심리학은 끈기 그 자체보다 끈기를 언제,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능력에 훨씬 주목한다. 사람이 성취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자기효능감(Efficacy)이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사람은 더 자주 시도하고, 실패해도 전략을 바꾼다. 끈기는 고집스럽게 버티는 힘이지만, 자기효능감은 유연하게 다시 시도하는 힘이다.


둘째,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다.

실패하거나 좌절해도 빠르게 돌아오는 능력은 지식 노동 환경에서 특히 중요하다. 현대 조직에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끝까지 버티는 과제보다 끊임없이 맥락이 바뀌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셋째, 학습 민첩성(Learning Agility)이다.

변화하는 조건에서 피드백을 빠르게 흡수하고 전략을 수정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지금의 시대에서 결정적 역량은 과거 전략을 버티는 힘이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과거 전략을 내려놓는 능력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그릿보다 성취를 더 일관되게 예측한다는 연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릿은 버려야 하는가? 아니다. 다만 ‘제자리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릿은 완전히 무용한 개념이 아니다. 장기 프로젝트, 반복 훈련, 초기 성과가 더디게 나타나는 분야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릿이 만능 열쇠처럼 오해되면서, 개인의 노력만 강조하고 시스템, 전략, 적합성이라는 본질적 요소가 가려진다는 점이다.


그릿을 폐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맞게 재배치해야 한다. 끈기는 필요하지만, 무엇을 지속할지 판단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판단은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 제공하는 환경과 피드백 시스템이 만들어준다.


결국 필요한 건 ‘더 많이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더 현명하게 조절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끝까지 버티면 결국 이긴다'라는 서사를 사랑해왔다. 그러나 실제 삶과 조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버틸 필요가 없는 곳에서 버티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소모이며, 전략을 바꿔야 할 때 끈기만 강조하는 것은 탁월함이 아니라 비효율이다.


그릿이 말하는 지속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지속성은 선택적이고 전략적이어야 한다. 무엇을 버티고 무엇을 포기할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판단을 돕는 구조를 만드는 조직이 결국 더 강하다.


끈기에 열광하기보다, 끈기를 올바르게 써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때다. 성공은 버티는 사람에게만 오지 않는다.


심리학이 전통적으로 주목했던 자기 조절, 메타인지, 인지적 유연성, 학습 민첩성, 정서 조절 능력이 이러한 조절 능력을 매우 잘 예측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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