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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Jun 09. 2022

Nirvana의 Lithium에 담긴 '나의 해방일지'

POP으로 배운 심리학

최근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를 완주했다. 인상 깊은 장면들이 많았는데, 8화에서 Nirvana의 Lithium이 흘러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오'하는 소리가 나왔다. Lithium의 가사가 곧 '나의 해방일지'였기 때문이다.


Light my candles in a daze Cause I've found God

(촛불을 켜며 멍해졌어. 왜냐면 나는 신을 찾았거든)

드라마 속 구씨는 술을 마시며 종일 멍 때리며 지낸다. 그냥 멍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이쪽 창문을 보면서 한 잔하고, 해질 때는 베란다를 보면서 한 잔 마시고, 밤에는 또 저쪽 창문 보면서 한 잔을 먹는다. 각도만 딱 바꿔가면서.


멍 때리는 것은 뇌과학적으로 Default Mode Network(DMN)을 활성화시키는 방식이다. 2001년 신경과학자인 워싱턴 대학교 마커스 이클(Marcus Raichle) 교수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를 발견했다. 뇌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자극해야 활성화된다는 것이 기존 이론이었지만, 특별한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이 물결처럼 흐르게 놔둘 때 fMRI 영상 속 DMN이 반짝거렸다. 연구에 따르면, 이 영역이 활성화될 때 사람들은 '내면의 지혜'라는 뇌 속 잠재력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나 깨달음을 얻는 이유가 바로 이 DMN의 역할이다.


정상인이 멍 때릴 때는 이 영역이 활성화되지만 알츠하이머 환자는 이 영역이 멈춰있다. 또, ADHD 진단을 받은 아이들도 끊임없이 주변에 있는 뭔가에 신경 쓰기 때문에 DMN이 활성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ADHD의 집중력이나 창의성이 떨어지는 이유를 DMN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너바나는 촛불을 켜며 멍해지지만, 구씨는 술을 마시며 멍을 때린다. 그리고 사람들을 생각한다.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심리학과 로져 마스(Rogier Mars)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사회적 뇌(social brain)와 DMN이 서로 공유된 영역이 있다(Mars, R. B., Neubert, F. X., Noonan, M. P., Sallet, J., Toni, I., & Rushworth, M. F. (2012).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default mode network” and the “social brain”. Frontiers in human neuroscience, 6, 189.). 그래서 멍 때리며 사람들을 생각하는 구씨는 뇌과학적으로 자연스럽다. 하나 더, 너바나는 신을 찾아 멍해지지만, 구씨는 해방을 꿈꾸며 멍을 때린다. 염미정을 만나기 전 구씨의 유일한 해방구는 술이었고, 신을 찾기 전 너바나는 우울증 약(Lithium)을 먹는다.


I'm so lonely, that's okay, I shaved my head

(나는 너무 외롭지만 괜찮아, 내 머리를 밀었거든)


 

염기정은 겨울까지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머리를 자른다고 말한다. 염기정에게 머리카락은 사회적 정체성이다. 출근 전, 바쁜 아침에도 머리를 감고 말리면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헤어스타일로 완성한다. 경기도민의 정체성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며 휴일이면 헤어 스타일을 바꾸는 게 일상이다. 그렇다고 서울 사람들에게 경기도민, 산포시민으로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그 누구도 자신의 곁에 없을 외로움이 그것도 추운 겨울에 닥친다면 머리를 자르겠다고 선언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너바나의 가사를 떠올렸다. I'm so lonely, that's okay, I shaved my head. 조태훈과 연인 사이가 되어 더이상 머리를 자를 필요가 없던 염기정이 결국 머리를 자른다. 조태훈이 곁에 있지만, 심리적으로 떠났다고 오해하는 시점에서다. 나는 외로우면 머리를 자른다는 말을 너바나의 가사 외에 다른 서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작가는 너바나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I'm so happy cause today I've found my freinds

(나는 너무 행복해 오늘 난 친구를 찾았거든)


드라마 속 모든 등장인물들은 나름의 행복을 바란다. '우리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쨍하고 햇볕 난 것처럼. 구겨진 것 하나 없이.' 하지만 무엇이 행복하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염창희는 서울에 살면 촌스러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롤스로이스를 타면 행복해지고 회사를 그만두면 자유로울 것으로 착각한다. 염기정은 더 나이 들기 전에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50이 되면 불행한 인생이 될 것이기 때문에 더 늙기 전에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염미정은 자신을 추앙할 사람을 만나길 바라고, 구씨는 과거의 기억에서 해방되길 바란다.


하지만, 각자의 삶에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이들에게 행복은 곁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찾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염기정은 조태훈으로부터, 염창희는 지현아와 지현아의 전남친으로부터, 염미정은 구씨로부터 행복을 발견한다.


행복을 찾은 구씨는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무서워 도망친다. 그리고 염미정을 다시 만날 때까지 무슨 일을 해도 누구를 만나도 결코 행복해지지 못한다. 염미정 역시 마찬가지다. 삶이 최악으로 망가지기 직전에 구씨의 전화를 받는다.


I'm so excited, I can't wait to meet you there

(난 너무 좋아. 널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I love you, I'm not gonna crack

(널 사랑해. 난 무너지지 않을거야)



결국 다시 만난 염미정과 구자경. 이들은 너바나의 가사처럼 결코 무너지지 않고 다시 만나 행복해지고 둘이 아닌 하나의 사랑을 완성한다.


We've broken our mirrors

(우리는 거울을 부쉈어)


And I'm not scared

(난 무섭지 않아)


And I'm not sad

(난 슬프지 않아)

 

너바나의 가사에선 거울을 부쉈지만, 염미정과 구씨는 함께 가로등을 부수고 서로가 함께 있어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다.


나의 해석이 Lithium의 가사에 억지로 껴맞춘 것이라고 해도 변명하고 싶지 않다. 염창희가 영혼의 끌림으로 소중한 사람들의 임종을 챙긴 것처럼 드라마에서 너바나의 노래가 흘러나온 것이 우연이 아닌 끌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염기정이 조태훈을 만나 너바나의 세상도 함께 만난 것처럼, 조태훈이 너바나 앨범을 보면 염기정이 떠오른다고 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너바나의 Lithium을 들으면 '나의 해방일지'가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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