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하세요 ; 회사를 이해하는 필수 동사

동사, 다시 생각하다

by 심 취하다

메일함에 메일이 차곡히 쌓인다.

함박눈이 소리 없이 소복소복 쌓이듯.


메일에 포함된 이 문구는 어찌해야 하는지 머리가 아파온다.


참고하세요

참고바랍니다.

참조바랍니다.

FYI


참고, 누구냐? 넌!


'참고하세요'라고 읽고
'업무지시'로 해석 하다



직장사전_참고하다

1. 살펴서 알아서 처리해라

2. 전달했으니 알아서 해라

3. 상대에게 책임을 넘긴다


국어사전_참고하다

1. 살펴서 생각하다

2. 살펴서 도움이 될 만한 재료로 삼다

*유의어 : 참조하다, 참작하다, 감안하다




하루 업무를 시작하는 열정 일꾼. 메일을 열어본다.

발신 : 사업기획팀 꼰대 얌체 일꾼
수신 : 아태물류팀, 미주물류팀, 유럽물류팀, 물류지원팀

안녕하세요.
내년도 사업계획 자료 및 보고회 주요내용 송부드리오니 참고 바랍니다.

'두 달 동안 야근을 하게 만들었던 사업계획이 끝난 건가'라며 안도하며 다음 메일로 넘어간다. 3일 뒤 꼰대 일꾼이 소리치며 다가온다.

"열정 일꾼! 메일 확인 안 했어? 본부장님이 멘트하신 사업계획 수정 보고 아직 안 했어? 뭐 하는 거야"

열정 일꾼은 어리둥절하며 허겁지겁 메일을 다시 찾아본다.

"사업계획 공유 메일은 있는데, 수정 요청 온 메일은 없어요"

꼰대 일꾼은 더 큰 소리로 나무란다.

"이 친구야. 그 메일에 첨부된 자료 수정하라는 거야. 당장 내일 재보고인데 어떻게 할 거야!"


'참고하라' 고 해서 눈팅만 했는데
'수정하라' 는 메일이라고?


꼰대 일꾼은 남들보다 일찍 1시간 일찍 출근한다. 일에 대한 열정이라기보다 혼잡한 지하철을 피하고 싶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한다. '느릿느릿, 책임감도 없고. 요즘 MZ 친구들이란...'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하나씩 빠른 속도로 처리한다. [전달] 버튼을 누루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입력한다.


"업무 참고하세요"

"참고바랍니다"

"FYI"

"참고"


이렇게 30분 만에 메일을 모두 해결한다. '난 역시 일잘러야. 남들이 출근하기도 전에 업무를 다 마쳤네. 도대체 다들 왜 야근을 하는 거야?' 주위를 둘어보니 하나둘 출근하는 일꾼들이 보인다.

'나는 하루 일을 다 끝냈으니, 티타임이나 가져볼까나'


일꾼들이 하나 둘 업무를 시작한다. 꼰대 일꾼이 아침 일찍 전달한 메일을 확인하는 일꾼들은 아침부터 뒷목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의욕을 상실한다.

수신자도 여러 명이다. 누구에게 참고하라는 걸까? 참고라는 멘트를 빼고는 아무 내용이 없다. 뭘 하라는 건지? 왜 전달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무시해도 되는 건지, 읽어만 보면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꼰대 일꾼에게 물어보려 자리를 찾아가지만, 하루 종일 이 핑계 저 핑계로 자리 비우기 일쑤다. 운 좋게 만나더라도 퉁명스럽게 대답할 뿐이다. "메일 안 봤어? 메일 보냈잖아?"


부연설명 없는 참고 메일.
뭘? 어떻게? 하라는 걸까.

총무팀으로부터 협조전이 접수되었다.

발신 : 총무팀
수신 : 전 팀

귀 팀의 업무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내년도 다이어리 및 달력 소요량을 조사하여 회신 바랍니다.
- 회신기한 : 00월 00일 수요일
- 작성방법 : 팀별 소요량 기재 (판촉용 포함)

팀장 일꾼은 팀원 모두에게 전달한다.

" FYI "

팀원 모두에게 적시에 정보를 공유하는 본인의 업무능력과 부지런함에 뿌듯하다. 두 달 뒤 총무팀에서 다이어리를 배포한다. 고객 배포용으로 120개가 추가로 필요한데, 올해는 팀원 인원수만큼만 배정되었다. 당황한 숙련 일꾼이 총무팀에 이유를 묻는다. "물류팀에서 협조전 회신이 없어서 팀원 수만큼만 신청되었어요. 협조전에도 미회신시 추가 소요량 없음으로 진행한다고 했는데..."


팀 회의를 소집하여 팀장이 팀원들을 쏘아붙인다.

"내가 협조전을 모두에게 공유했잖아?"

장수 일꾼이 말한다.

"작년에 숙련 일꾼이 하지 않았어? 난 숙련 일꾼이 한 줄 알았지."

숙련 일꾼은 당황한다.

"제가 그때 미국 출장 중이라..."

얌체 일꾼은 뻔뻔스럽게 열정 일꾼을 보며 말한다.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열정 일꾼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런 건 신입 일꾼이 눈치껏 챙겨야지'

갑자기 모두의 눈길이 신입 일꾼에 몰린다.

"그냥 참고하라고만 적혀 있어서 꼼꼼히 읽어보기만 했습니다. 저에게 지시하신 게 아니어서요."




일꾼에게 참고하다는 손쉽게 눈앞의 일을 떠넘기는 해결사이다. 참고 메일을 받은 일꾼에게는 짐덩어리이다. 뭘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직장에서의 참고하세요는 그 의미가 다양하다.


단순히 정보 공유의 의미라면

'자료 공유드립니다' 어때요?


추가적인 업무 요청이 있다면

'OOO 부탁드립니다' 어때요?


뭐가 뭔지 모르겠다면

'OOO 관련 논의드리고 싶습니다' 어때요?


여러 검토가 필요하다면,

업무 영역별로 구체적인 나눠서 설명 어때요?


참고하세요는 지금 당장 내 손에서 업무를 떠나보내 한 순간 마음이 편해지지만, 더 큰 숙제로 돌아오고는 한다. 참고하세요 라는 간단한 전달이 아닌, 구체적인 문구를 부탁한다. 번역하느라 고생하거나, 업무 실수로 힘든 일이 없는 일꾼의 하루를 응원하며. 꼭 참고하세요! 꾹 한번 참고, '참고하세요' 아닌 구체적인 멘트 부탁해요!


일꾼의 분류 ★

스타 일꾼 : 직장인의 꽃은 임원?

장수 일꾼 : 정년까지 꽉 채우는 실속파

꼰대 일꾼 : 네가 뭘 안다고, 지시형

숙련 일꾼 : 합리적 판단과 경험. 추진형

열정 일꾼 : 인정받고 싶다. 성공추구형

얌체 일꾼 : 나만 아니면 돼. 배짱이형

신입 일꾼 : MZ라 규정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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