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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Nov 03. 2017

직장인은 억울하다.

"워커홀릭"은 직장인에게만 적용되는가.

명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집에 있을 때도 사극을 찍는다며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거나 과묵한 연기를 위해 가족과의 대화를 거의 끊기도 한다. 밤샘 촬영을 하고 때론 며칠 째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는 이런 일화를 들으며 쉬 감탄한다. 그러나 이들을 일컬어 워커홀릭이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유사한 경우는 많다. 연주자가 집에서도 내내 연습을 하며 '나는 아직도 나아지고 있으니까요.'한다거나, 예술가가 연인과 데이트를 하다가 어떤 발상이 떠올라서 작업실로 곧장 발걸음을 돌린다고 하여 그들을 워커홀릭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단어는 직장인에게는 쉽게 붙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띤다. 퇴근을 잘 하지 않고, 집에서도 일 생각을 하며 가족과 있다가도 회사 전화만 오면 즉각 튀어나가는 사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제 3자가 볼 때 '저이는 회사에서 전화가 오길 기다린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인 사람도 있다. 그의 가족들이 느끼는 허탈감은 오죽하랴. (심지어 "가족이 있다고?"하는 놀라움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가족을 만들 틈은 있었냐는 뉘앙스로 말이다.)


직장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여기는 마음에서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꿈을 좇고 있는 것인데, 대부분의 직장인은 처음의 꿈은 잊은 채 생계유지를 위해 취업을 택했다는 식의 해석이다. 일견 잔인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런 뉘앙스는 존재한다.


사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인식을 내가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를 유발하는 원인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나는 그것을 '경계의 유무'라고 생각한다.


명배우가 위에서 언급했던 기행을 했다더라도 촬영을 마치고선 깔끔한 복장으로 토크쇼에 나와 '이번 영화는 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어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촬영 중과 촬영 후의 그를 분리해서 생각하게 된다.


다른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공연장에서 연주를 하거나, 전시회를 마친 뒤 소회를 밝히는 모습은 그 이전과 이후를 경계 짓는 것이다. 학생도 그렇다. 시험을 마쳤거나 새로운 곳으로 진학을 했다면 경계가 달라진다.


반면 직장은 경계 짓기가 쉽지 않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업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번 달 결산이 끝났다고 해서 다음 달 결산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며, 괜찮은 거래를 따 냈다고 다음 거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의 경계 짓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승진을 했다고 해서 일이 잠깐이라도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최근 '안식년 제도'를 도입하는 회사가 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생활의 경계 짓기다. 흔히 처세술 책에서 말하는 '집에서는 일 생각 않기.'가 이 영역이다. 그런데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실제로 해보면 죽을 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직장생활은 결국 '돈벌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쉬다가도 무언가를 사야 한다거나 커가는 아이를 볼 때 행복하지만 어디 한켠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이것이라 생각한다. 돈을 벌려면 직장에 나가야 하고, 그러자면 일을 해야 한다.


즉, '내가 아니면 회사가 안 돌아 가!'하는 거창함이나, '이러다 잘릴지도 몰라!'하는 불안함이 아니다. 그냥 생활과 돈과 일이 연결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팩트다. 이것을 벗어나려면 역시 돈과 연관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핵심은 '기회비용'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실생활에서 써먹야 한다.


회사에 있을 때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출근은 일을 위한 시간이다. 일터에서 일을 제대로 안 해 잘리는 기회비용은 내 연봉이다. 반면 집에 왔을 때는 가족을 위한 시간이다. 이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내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다. 회사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면 경중을 따질 순간이다. 회사에서 잘릴 위험이 더 크다면 가족의 양해를 구해야 하고, 가족이 나를 버릴 만큼 중요한 행사 중이라면 회사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명배우도 마찬가지다. 좋은 배우는 하나의 배역에 잘 녹아드는 사람이고, 더 좋은 배우는 그 역할이 끝난 뒤 잘 빠져나오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해법 역시 기회비용으로 설명 가능하다. 촬영 중에 제대로 하지 않는 태도의 기회비용은 지금 영화의 출연료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깔끔하게 빠져나오지 않는 것의 기회비용은 '다른 다양한 역할이 가져다 줄 잠재적 출연료'다.


자, 이제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볼 타임이다. '집에서 일 생각 않기'라는 문구처럼 말은 쉬우나 또 적용은 쉽지 않을 것이다. 좋은 배우는 많아도 명배우는 많지 않윽 것처럼 말이다.




* 또 하나의 대안으로 '자뻑'을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고액의 출연료를 받고 느긋하게 쉬는 배우의 심정처럼, '역시 나는 이번 주도 멋지게 일을 해 냈으니! 후후'하는 마음으로 쉬려면 약간의 '자뻑'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자뻑도 쉽지 않다. 자뻑을 하는 것의 기회비용은... 됐다. 관두자.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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