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서 현금을 활용하는 목적
나 없이 와이프와 딸 둘이서만 처가에 다녀왔을 때다. 와이프가 재미난 일화라며 얘기를 전해줬다. 외가에서 놀고 있는 딸에게, 마침 놀러 오신 어르신께서 용돈을 만 원 쥐어 주시며 '맛있는 것 사 먹어라~.' 하셨단다. 일곱 살 따님은 요새 자기가 푹 빠져있는 요괴 메카드 볼이 약 9,700원 정도 하는 것을 알기에 그 돈을 어르신께 다시 돌려드리며 얘기했단다. '맛있는 것 사 먹으라 하지 말고 요괴 메카드 사거라 하면서 다시 주세요!'
이틀 뒤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엄마 손을 잡고 기차역 플랫폼에 선 딸에게 이번엔 외할머니가 '맛있는 것 사 먹어라~.' 하시며 용돈을 찔러 주셨다. 딸은 그 돈에 걸맞은 가격의 물품이 선뜻 생각나지 않아 한숨을 푹 쉬며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왜 다들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만 그래?
딸의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문득 모든 돈에는 사용처가 정해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물교환 (Barter economy)이 갖는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용처를 특정하지 않은 교환의 매개체'로서 발명한 것이 화폐(=돈)인데 사용처가 정해진다니, 일견 모순된 질문 같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화폐의 정의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졸업한 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교과서에 적혀있던 화폐의 역할은 다음의 세 가지였던 것 같다. 교환의 매개체/ 가치 평가의 단위/ 가치 저장 기능. 그렇다면 위에서 '화폐=돈'이라고 얘기한 것은 교환의 매개체로서의 정의에 한정될 뿐이다.
화폐의 용처를 구분한다는 것은 가치 저장 기능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돈의 용처를 논한다는 것은 A에 쓰는 돈보다 B에 쓰는 돈이 낫다는 류의 얘기를 한다는 것이고 이는 가치에 대한 비교가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돈의 용처를 구분 짓는다는 것은 어떤 게 있을까? 월급이나 용돈을 받았을 때, 이 만큼은 저축용, 이 만큼은 즐거움용, 이 만큼은 비상용이라는 식으로 나눠둔다면 그게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업이 돈의 성향을 가른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이론 전개의 편의를 위해 이익이 쌓이는 우량한 기업을 생각해 보자.
가장 쉽게 생각나는 것은 투자성향이 되겠다. 벌어들인 돈 중 얼마 만큼을 투자로 돌릴지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당장 건물과 같은 자산을 사는 게 아니지만 미래의 더 큰 소득을 위한 기다림이 필요한바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인 격이다. 그러나 이는 기업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기업이니까 가능한 측면도 있다. 물론 연구개발 직종에 종사하는 인재들의 소득원이라는 기능도 있다.
다음은 배당성향이다. 현금 중 얼마를 주주들에게 나눠주느냐의 문제다. 이 기준은 나라마다, 회사마다 다르다. 그래서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 투자처를 고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자잘한 배당 없어도 좋으니 주가가 많이 올라 차익실현을 꿈꾸며 A사의 주식을 살 것이고, 다른 이는 노후를 대비한 연금처럼 배당성향이 높은 회사를 골라 꾸준한 현금흐름을 확보하고자 B사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많다. 직원 성과급으로 나눠 줄 수도 있고, 대여금을 갚을 수도 있으며, 건물과 같은 자산을 살 수도 있고, 기부를 하는 데 쓸 수도 있다. 물론 어느 곳에도 쓰지 않고 통장에 넣어 둔 채 은행 이자 수익 정도만 올릴 수도 있다.
돈은 용처가 없다. 돈을 벌었더니 거기에 꼬리표가 달려있어서 그대로 행동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 역시 개인이나 기업의 판단에 의존한다.
기업의 판단은 투자자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다시 기업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것이 물리고 물려 기업과 투자자의 성향이 특정한 형태로 수렴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기업에 차익을 노리는 투자자가 모이고, 안정적 성장을 영위하는 기업에 고배당을 추구하는 투자자가 모인다. 일종의 그룹화다.
가끔, 일부 돈의 용처가 정해져 있다는 식의 주장을 들을 때가 있다. 과연 그러한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 또 하나의 흥미거리 : 회사 배당성향은, 그 안에서 일하는 직원에게도 영향을 미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