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슬로운, 제로 다크 서티, 그리고 제시카 차스테인
출장길은 길었다. 앞좌석 뒤통수에 붙은 화면에는 착륙까지 세 시간 정도가 남았다는 메시지가 떠 있다. 가장 애매한 시간이다. 영화를 보자니 끝나면 이내 착륙이고, 잠을 자자니 시차는 이미 어긋난 데다 건조한 공기에 눈을 붙이기도 쉽지 않다. 전자책이 수리 전이라 오랜만에 종이책 한권만 들고 항공기에 오른 탓에 독서 역시 한계치였다.
뒤척이다가 그냥 표지만 보고 영화를 한편 골랐다. 제목은 '미스 슬로운'. 주연은 제시카 차스테인. 잘 나가는 여성 로비스트의 이야기다. 영화 설명만 봐서는 2류 첩보영화일 것 같더니, 막상 보니 꽤 재미있다. 어째서 영화 줄거리 요약을 저렇게 밖에 못할까 싶은 정도였다. 어느 순간부터 대부분의 서양 반전 영화는 모두 미션임파서블 시리즈처럼 설명을 해야 한다는 불문율이라도 생긴 것 같다.
어쨌거나 그녀의 연기가 너무 좋아 출장지 주말에 구글 무비로 '제로 다크 서티'를 결제하고 밤을 걸쳐 다운을 받았다. 그녀가 주연을 한 영화였고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는 작전을 다뤘다. 가만 보니 예전에 신나는 전쟁영화인 줄 알았다가 아니어서 보기 포기했던 기억이 나는 듯했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식 영화였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해외라 할 게 없어서인지, 제시카 차스테인이 좋아서인지 이번엔 포기 않고, 오히려 어느 정도의 열정까지 느끼며 2시간 30여분 짜리 영화를 4일 정도의 밤에 걸쳐서 봤다.
신기하게도 두 영화는 모두 제시카 차스테인 단독샷으로 끝난다. 자신이 모질게 이끌어 왔던 일들이 모두 끝난 후의 모습이다. 방황인 듯 아닌 듯 보이는 그 표정이 은근히 생각들을 일으킨다.
추구하던 목표가 끝났을 때 나는 어떨까. 아니 그 이전에 목표를 달성할 만큼 집요하게 달라붙긴 했는가. 아니 그 이전에 목표란 건 있었나. 아니 그 이전에 목표를 왜 세워야 하는지, 필요는 한 건지 고민은 했었나.
귀국 편에서 미스 슬로운을 다시 켰다. 영화가 끝날 때 이번에도 그녀는 홀로 있다. 어디로 가려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무료한 주말에 문득 인터넷을 뒤져보니 미스 슬로운이 실화인지 궁금해하는 글들이 많다. 변호사 출신인 작가가 첫 작품으로 제출한 극본이 이목을 끌었고 영화화된 픽션이라고 한다. 왜 이것이 실화인지 궁금했을까. 현실에도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길 바란 걸까. 언젠가 아는 동생에게, 도피로서의 공부가 되지 않게 조심하라 말한 적이 있다. 미스 슬로운이 현존하길 바라는 심리도 일종의 도피일까. 내가 꿈꾸던 삶을 살아주는 멋진 이가 있고 나는 그에게 내 희망을 투영할 수 있길 바란 것이라면, 그것 역시 일종의 도피일 것이다.
* 하지만 공부를 하던 동생은 그 기반이 탄탄했다. 고민만 하던 내가 세 치 혀를 또 헛놀렸나 싶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는 게 정답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