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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Dec 01. 2017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성인(成仁)이 필요하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한창 인기였다. 친구들 몇몇이 모이면 우린 종종 PC방으로 향했고 어김없이 스타크래프트로 몇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구성원 수에 따라 때로는 우리끼리, 때론 웹 상의 다른 유저와 게임을 하곤 했다. 


"이 사람 또 있네."


PC방에 모였던 어느 날 친구가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들에게 그 사람의 아이디를 보여주었다. 그 사람은 자기소개란에 명언 한 구절을 넣어놨다. 대부분 'World No.1 Champion!"과 같은 뉘앙스로 포장을 하던 항목에 명언이 들어가 있었다. 엉뚱하다는 느낌에서였을까. 그 구절이 뇌리에 남았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그는 고등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친구와는 종종 게임상에서 마주쳤던 모양이었다. 그날은 나도 그와 함께 게임을 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 과거를 곱씹으며 살게 마련이다. 어떤 문맥에서든 좀 더 멋진 말로 서두를 장식하고 싶은 마음도 커져 간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사람이 겸손해지기란 참 힘든 일이다.


경제학을 전공한 철없던 시절의 나는 경제나 돈에 관련된 대화에서 꼭 나서고 싶었다. 누군가 제 몫으로 갖기에 부담스러운 어떤 물건을 언급하면 철없던 나는 목을 가다듬고 조언을 해 댔다. 과거 뇌리에 남겨두었던 문맥은 내 말을 장식하기에 적당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 법이야. 그걸 사더라도 통장 잔고에 영향이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 것을 사는 거라고."


슈퍼카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그 차를 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축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도 특정한 축구팀이나 선수를 좋아할 수도 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게 있는 법이다. 철없던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타인들의 마음을 저 말을 빌어 종종 깎아내리고 말았다. 나만이 리얼리스트라고 외치고 다닌 격이었다.


당시의 나도, 지금의 나도 가진 잔고라고는 물 바닥이 보일 수준이다. 비가 오면 넘치고 하루만 안 와도 말라버리는 왜소한 형태였다. 바다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체 무엇을 믿고 그리도 입을 쉽게 열었던 것일까. 아니, 핵심은 그게 아니다. 내 잔고가 바다든 바닥이든 무관하다. 그냥 나선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남의 즐거움을 깎아내린 것이 문제다.






나이가 좀 더 들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자 저런 류의 조언 자체를 삼가게 됐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했던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삶의 여러 부분에서 실감했다. 지난 철없던 시절을 생각하면 마치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나만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며 저 말은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돈과 연관된 부분이 아니라 저 말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와 닿았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잠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떠올랐다. 잡상이란 늘 그렇게 다가온다.


바다가 비에 젖지 않는 것은 바다가 깊고 넓기 때문이다. 내리는 비에 비해 애초에 있던 바다 물의 양이 몇 곱절 크다. 1살 아기가 내게 주먹질을 하면 아무런 효험이 없고, 내가 63 빌딩 기둥에 주먹질을 한다고 해서 건물이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비는 바다의 표면을 적실 뿐이다.


속이 큰 사람은 주변의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자면 그 속이 어지간한 세상의 풍파보다 몇 곱절 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다가 모든 강물의 흐름을 받아들이듯 세상의 일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갑자기 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 힘든 일이구나."


저 명언을 적어둔 아이디를 발견하고 내 친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듯, 나도 창밖을 보다 말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힘든 일이다.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성인(成仁)이 필요하다. 힘든 일이지만 참고 이뤄내면 바다 같은 진중함을 가질 수 있을까. 연말을 앞두고 문득 어떤 다짐을 해본다.






* 인터넷을 찾아보니 많은 사람들이 저 구절의 출처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꼽는다. 반면, 헤밍웨이는 어떤 저서에서도 저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구인환의 수필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아직 "노인과 바다"를 읽지 않아서 검증할 길이 없다. 또 한 번 부끄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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