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공리주의에 대해 배울 때였다.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을 수치화하여 다양한 행복 간의 서열을 매길 수 있다고 했으며 그 공식으로 행복에 대한 강도와 지속성을 언급했다. 희한하게도 그 발상이 뇌리에 남았다.
요즘 외국인들 사이에서 영어로만 일을 하자니 피로도가 높다. 여태껏 출장에선 순수하게 영어를 쓰는 시간이 길어봐야 하루 서너 시간이나 되었을까. 딱 그만큼은 큰 문제 없었기에 그동안 충만했던 자신감이 여기에 와시 비로소 사상누각처럼 스르륵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어떤 순간에는 내 귀로 흘러오는 내 영어를 들으며 '아, 이게 말이냐... 똥이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다가 곰곰 내 영어 패턴을 분석해 봤다. 어떤 날은 '역시 나 정도면 괜찮지!' 하다가도 왜 어떤 날은 '대체 내가 중학교 졸업은 했던가!' 하는 수준이 되는지 궁금했다.
우선 내가상대의 언어 수준을 따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상대가 정식 영어를 쓰는 미국인이면 나도 비록 느릴지언정 최대한 제대로 된 발음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문장을 구사하고 상대가 나만큼 허둥대는 타국 출신이면 나 역시 더 버벅대고 있었다. 일종의 미러링 같은 효과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내 변동성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이번엔 시계열 분석을 시도했다. 하루를 시작부터 끝까지 곱씹어 보다가 하나의 현상을 더 발견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영어 사용에 대한 피로도'였다. 즉 평소엔 간간히 출장 때나 하루에 서너 시간 고작 쓰던 타국 언어를 하루 종일 얘기하려니 정신적으로 한계비용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서두에 언급한 공리주의자들의 행복 공식과 비슷했다.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결코 약하지 않은 강도로, 하루 종일 지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제아무리 또박또박 말해주고 인내심을 가진 미국인과 대화해도 그게 오후 늦은 시각이면 나는 헤롱 대고 있었다.
이를 위한 해결책은 역시 시간뿐이다. 마치 시차 적응을 위해서는 그저 하루에 몇 시간씩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자면 다시 한번 인내가 요구된다. 그리고 인내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얼굴에 깔 철판이다. 그 철판에 웃는 표정을 그려두면 금상 첨화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커피 마시러 가자고, 점심때 밥 같이 먹자고 하는 동료들 앞에서 여전히 흔쾌히 외친다.
"Sure, why not?"
웃는 철판을 깔았다. 살아 온 세월만큼 충분히 두껍다. 몇 개월 뒤에 웃으며 이 글을 다시 보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