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도 집을 구하고 짐을 옮기고 나니 역시나 자장면이 먹고 싶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삿날엔 역시 자장면인 것이다. 사실 짐을 옮기는 내내 치킨이냐 분식이냐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나도, 와이프도, 딸도 모두 기꺼이 동의한 채 우린 한국식 중국집으로 향했다.
한국식 중국집이란 말은 묘하다. 중국음식을 한국식으로 한다니 묘하지 않다면 이상하다. 여러 메뉴가 본토 중국집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자장면의 맛으로 구분하는 편이다. 방법도 단순하다. 캐러멀이 들어가서 달콤한지, 오로지 춘장만 넣어 색도 진하고 달지 않은지만 보면 된다. 당연히 한국식은 전자다. 홍콩 뒷골목의 허름한 식당에서 '너 진짜 중국 자장면 먹어 볼 테냐?' 하시던 높은 분의 제안에 순순히 넘어갔다가 쓴맛을 본 본토 맛은 적어도 이삿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호기롭게 세명이라 밝혔다. 미국에서 영어를 쓰지 않는 가게는 그 자체로 감사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물 따라 주시는 분이 오기 무섭게 고맙다는 인사부터 말했다. 그런 감정은 전달이 되는건지 실제 재작년 휴스턴에선 주말 저녁을 혼밥으로 한인식당에 갔다가 고맙다는 인사만으로 아주머님의 포옹을 받고 계란 프라이를 두 개 득하기도 했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미국에 있는 한국식 중국집은 가격이 참했다. 요즘은 7세 딸이 1인분을 거뜬히 먹는다. 게다가 미국에 와서 뜬금없이 5세로 회귀했다는 것이 화가 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되뇌니 어른만큼 먹으려 애 쓸 그녀의 양을 분명 고려해야 했다.
자장 곱빼기+하얀 짬뽕+탕수육 미디움.
우리가 고른 것은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이삿날에 충분히 걸맞은, 그리고 딸의 양도 조금은 고려한 구성이었다. 물론 실제로 나온 음식들의 엄청난 양을 보고선 결국 좀 남겨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른이 되고자 젓가락을 허우적 대며 자기 그릇(bowl)에 담긴 자장면을 자기 볼에 묻혀가며 먹던 딸이 배가 좀 찼는지 갑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딸 : 예전에 외삼촌 집에 갔을 때 중국집 간 적 있어. 그때 OO이랑(조카 1) OO이가(조카 2) 자장면 먹을 때 모두 뺨에 검정을 묻혔지 뭐야. 나는 하나도 안 묻었는데 말이지.
나 : 오, 우리 딸은 그래도 OO이(조카 1=큰 조카) 보다 한 살 언니라서 자장면 먹는데도 하나도 안 묻혔구나?
나는 내심 대견했다. 지금 입가에 조금 묻은 자장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언뜻 보면 조금 두텁게 바른 립스틱 수준일 뿐이다. 상념이 딱 그정도 다다랐을 때, 문득 돌아온 딸의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