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문득 고마운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순간이 있다. 내가 영어를 버벅대도 차분히 기다려 줄 때다. 혹은 친절한 표정으로 내가 하고픈 표현을 가르쳐 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럴 때 느끼는 부끄러움은사실 나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확대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가만 들어보면 그들이 하는 얘기에도 버벅댐이 있다. 단지 그들에겐 스스럼이 없고 우린 스스로 지나치게 뻘쭘해한다는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언젠가 무안한 마음에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초등생스러운 발상이지만 나는 이 말을 내뱉고 말았다.'우쒸, 나 이래 봬도 한국말은 디따 잘해!' 동료들은 이 말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 순간 뭔가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며칠 뒤,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한 한국인 동료와 얘기를 하다가 비로소 그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1. 미국인은 일단 말이 많다. 그래서 small talk이란 게 있다. 업무 전 삼삼오오 모여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뭐가 화제인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눈다. 심지어 정치 얘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누구네 아들이 다쳤고 누구네 집 지하실에 물이 터졌는지 다 안다.(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며 지낸다는 관용구는 우리나라에서 들었는데.)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 기껏해야 날씨 얘기다. 정치나 종교 얘기는 피하는 게 낫고 책이나 전문적 관심사는 동호회가 아니면 썰을 풀기 어렵다. 과묵함이 어른들만의 영역은 아닌 게, 젊은이들 앞에서 입을 길게 열었다간 'TMI'라는 장벽에 막힌다.
2. 온 가족이 외국에 나갔을 때 애기들이 말을 빨리 배우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무슨말이든 하고 듣기 때문이다. '어제 꿈속에서 우주전사가 파란색 옷을 입은 괴물을 레이저 광선검으로 물리쳤어!'라는 대화가 통용되는 게 아이들의 사회다. 저 말을 영어로 번역 가능한 어른 있는가?('어제 내가 꿈을 꿨는데..'로 대화를 시작해 보자. 10초 이내에 '오, 오늘 로또 사게?' 하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와 저 사람 말 잘한다!'라는 평이 생기지만 외국사람에겐 '네가 너네 모국어 잘한다니 멋진 농담인걸!'정도로만 다가갈 뿐이다. 그들에겐 talkative는 기본이고 얼마나 logical한지로 우위를 가리는 게 더 익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