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철근육 Jul 03. 2019

700원짜리 과자

빚이 있을 때 빛이 났던 과자

추억이란 건 곱씹을수록 맛을 달리한다. 피천득 선생이 '인연'에서 다뤘듯, 때론 다시 경험하지 않고 머릿속에만 담아두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학교의 운동장이 생각보다 작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광활함을 맘껏 누비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빛을 잃을지도 모른. 그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손을 잘 대지 않는 과자가 있다. 싫어서는 아니다. 가끔 처가댁에 가면 장모님께서 간식으로 건네주시는데 소중하게 한입 먹으면 그 맛은 여전히 일품이다.


대학시절 나는 돈을 꽤 벌었다. 학기 중과 방학 때의 편차가 있었지만 평균으로 치자면 한 달에 200만 원은 벌었다. 나는 그 돈을 고스란히 지방 부모님께 부쳤다. 내가 번 돈을 마음껏 쓰지 못한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1997년 11월 우리나라에 금융위기가 닥쳤고 12월 3일 뉴스를 통해 IMF라는 기관의 조언에 따라 국제기구들로부터 엄청난 돈을 빌리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기억치인 내가 이것을 시점별로 명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우리 집안도 위기를 피해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빚을 졌던 그 시점에 우리 집안에도 빚이 생겼다. 어른들 한테서 빚이 얼마라고 얘길 듣는데 그런 큰 숫자는 수학 문제집에서 말고는 처음 보는 것이라 놀랐다. 너무 커서 되레 무덤덤해진 그 금액 앞에서 나는 사춘기도 없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재수학원, 대학교 모두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재수학원에서 모의고사 성적에 따라 지급되는 추가 장학금으로 용돈을 벌충하고 대학 때 비로소 생활 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과외, 수험 학원 조교, 고시학원 답안 첨삭, 신간 책 자료 조사 등 당시 내게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는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그렇게 벌어서 모조리 고향집으로 부쳤다.


내 용돈은 30만 원이었다. 달리 이유는 없었고 하루 만원이면 충분하지 않겠냐는 막연한 판단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게 대학 내내 이어졌다. 내가 집으로 부치는 돈에서 이를 제하고 보내도 되었지만 나는 몽땅 부친 뒤 30만 원을 받는 쪽을 택했다. 나도 용돈은 부모님께 받아서 쓴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생이 하루 만 원 쓸 게 뭐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대학생이니까 하루 만 원도 부족했다고 대응할 거리도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대개 집 앞 슈퍼마켓에서 내가 집는 것은 라면류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하루 내가 사치를 부리는 날이 바로 용돈 받는 날이었다. 마치 직장인들이 월급 받으면 치킨을 사서 먹듯이 나는 부리나케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700원짜리 과자를 집어 올렸다. 당시 선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과자들이 500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나는 용돈날에 꼭 200원어치의 사치를 부렸던 셈이다. 500원 짜리라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700원짜리를 내가 유독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평소에 선뜻 잡기 어렵다는 그 생각이 나름 무거웠던 것 같다. 어쨌거나 한 달에 한번 나름의 의식 같은 그 순간, 녹여먹기엔 딱딱한 그 과자가 입안에 남기던 고소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008년 우리 집은 빚을 다 갚았다. 글로 쓰니 평탄해 보이지만 이면에 숱한 눈물이 있었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조기 퇴사해 퇴직금을 그대로 빚 갚는 데 쓰셨고 하청업체로 옮겨 주말도 없이 일했으며 부잣집 둘째 딸로 곱게 자랐던 엄마는 각종 부업을 전전하다 보모일에 자리를 잡았고 그때 키웠던 아기는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 2008년 부모님을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 내 울던 나는 이제 직장인이 되었고 남편이자 아빠가 되었다.


눈물 없이 듣기 힘든 신파극 스토리를 하도 얘기해서인지 와이프는 아직도 마트에만 가면 그 과자를 집어 들며 묻는다. "안 살 거야? 그리 맛있었다며." 나는 군침이 돌다가도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도로 내려놓는다. "다음에."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3,000원 안팎이 돼버린 가격도 무섭지만 다행히 이젠 맘 편히 사서 먹을 수 있으니 그 탓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들어있는 무언가가 꼭 부서질 것만 같은 느낌은 정말 무서웠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와이프는 장모님께 몰래 말씀드렸고, 과자라면 손사래 치시는 건강주의자이신 장모님도 마치 귀한 음식 내놓듯 그 과자를 내어 주시게 된 것이다. 접시에 담긴 그것을 보노라면, 까짓 과자가 무언 대수냐 하다가도 한입 넣고 울컥하기도 한다. 늘 힘들 느끼던 시절에 살던 집앞의 오르막 골목길이 그 고소한 풍미에 오버랩되는 건 어떤 연유일까.


얼마 전 회사에서 공지가 떴다. 외기관으로의 파견이었다. 나는 며칠 고민을 했다. 그러다 문득 부서장 면담 신청을 했다. 맥락도 없는 면담 신청에 놀란 부서장님이 말씀하셨다.

"보내면 배울 것도 많고 또 누구보다 잘 하리란 것도 알지만, 지금이 사내 경력상 가장 중요한 시기라 좀 조심스럽네."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며칠간 고민한 건 내 커리어와 가족들의 적응과 곧 태어날 둘째 등에 대한 것이었지만 뜻밖에도 엉뚱한 말들이 나도 모르게 나오고 있었다.


"금융 위기를 겪었을 때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때 진짜 힘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집안이 힘들어졌던 탓도 있지만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게 힘들었습니다. 우리 집을 힘들게 했던 연대보증이란 제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힘도 없었고, 금융위기의 징조가 오는지도 모른 채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할 역량도 없었고, 왜 나라 전체가 두 눈 뜨고 당해야 했는지 고민할 지식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집은 빚을 다 갚았고, 우리나라도 빚을 다 갚았다. 우리에게 자금을 지원했던 그 기관들로 우리나라에서 직원들을 파견 보낸 것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되었다.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경제학을 배웠으며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귀퉁이나마 알고 있다. 위기가 오면 경보를 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곳은 내 삶이, 내 기억이 오롯이 녹아있는 곳이었다. 신림동 오르막이 아니라 미국의 한가운데에 말이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한인 마트를 들러 장을 보고 온 와이프가 과자를 한 꾸러미 내려놓으며 빙긋 웃는다. "과자 좋아하는 걸로 사서 왔어." 그 과자는 없다. 미국에서는 몇 불이나 하는지 여전히 다른 과자보다 비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기관에서의 파견이 끝나면 이젠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200원 더 비쌌던 그 과자에 녹아있던 내 아련한 모호함은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야 풀리는 자물쇠였는지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한국말 잘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