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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Jul 23. 2019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멀리서 보내는 외손자의 편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일요일에 둘째가 태어났고 목요일에 한국 짐이 도착해서 분주한 와중에 금요일 저녁, 아버지께 연락을 받았다. 한국 시각으로 토요일 새벽이었다. 요양원에 계신 지 3년 만이다.


얼굴이 원체 하얀 분이셨는데 머리카락마저 호호백발이 돼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왔다 말씀드리면 누워서도 눈에 눈물이 맺히셨다. 나는 할머니의 짧은 하얀 머리를 매만지며 얘기했다. "우리 할매 왜 이리 곱노."


외할머니는 담배를 태우셨다.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지금 와서 반추해 보니 근 50은 되어 시작하신 것 같다. 지금이야 다른 사람의 체취만 맡아도 흡연 여부를 알 수 있지만 그땐 어려서 몰랐던 건지 아니면 '할머니는 괜찮다.'는 막연한 인정이었는지 크게 괘념치 않았던 기억이다. 당시 담뱃갑은 지금처럼 빳빳하지 않아서 곧잘 접을 수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것을 쪽지 접듯 접어 엮은 뒤 방석을 만드셨다. 그러고는 손주들이 오면 가장 갓 접은 방석을 내어 주셨다.


나는 가장 새것을 자주 차지했다. 외손자인 데다 가장 맏이도, 가장 막내도 아니었는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내가 아기였을 때 부모님이 외가 근처 단칸방에서 잠시 살며 왕래가 잦았던 덕분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 나를 잠시 돌봐 주시던 날 외할머니가 하도 우는 나를 달래려 빈 젖을 물리셨다는 얘기는 친척들 사이에 유명한 일화다.


나는 어릴 적부터 눈치가 꽤나 빠른 편이었는데 사실 이게 아이에게 발현되면 퍽 슬픈 형국이 된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제때 표현하지 못하고 떼를 쓰지 않는 아이의 모습은 어른스럽기보다는 애처로울 때가 많다. 그런 나도 유일하게 누군가 내미는 호의를 흔쾌히 받았게 외할머니였고, 그리고 그녀가 유일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외할머니한테는 줄곧 반말을 썼다. 나이가 들며 부모님께는 스스로 존댓말 스위치를 올리듯 중 1 때 태도를 바꿨는데 외할머니한테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외갓집에 가면 내어주시는 안방 자리를 거절한 적도 없고, 밥을 먹고 갔지만 내 상황과 상관없이 차려 내 오시는 밥상을 거절한 적도 없다.


즉, 나는 외할머니의 흡연을 거절한 적도 없고 자리를 거절하지도 않았고 빈 젖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밥상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는 나를 거절하지 않은 외할머니에 대한 내 보답이었다.


우리 부모님의 결혼은 양가 모두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부잣집 혼수를 기대했던 시댁에서도, 조건에 맞지 않는 사윗감이 된 처가에서도 실망이 컸다. 부모님은 양가 모두에서 슬펐지만 참으로 지치지 않고 꾸준히 찾아뵀다. 예의 금융 위기를 유일하게 이겨낸 가족이 되자 외할아버지는 결국 우리 부모님 사진을 안방에 걸어놓으셨다. 하지만 그 굴곡진 세월 속에서도 나는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내 태몽을 꿔 주셨다고 했다.

'지붕에 호박이 세 개가 탐스럽게 열렸는 기라. 근데 니 엄마가 제일 좋은 거 달라고 떼를 쓰는 거 아니가. 언니들이 양보를 해가 그걸 느그 엄마가 가져 갔데이.'

어쩌면 내 인생의 시작 이전부터 외할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요양 병원에 찾아뵈면 나는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회를 두 접시 포장 해 가곤 했다. 하나는 외할머니 것, 나머지 하나는 같은 방 다른 분들 몫이었다. 초장을 입가에 묻혀가며 드시는 외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용돈을 슬몃 쥐어드리면 할머니가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저기 일하시는 저분 드리라.' 어느새 용돈을 쥐어주는 나이가 된 손주가 뿌듯한 듯 바라보던 그 눈빛이 기억난다.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받아들여 주셨는데 내가 가진 마지막 기억은 역시 내관점일 뿐이라 슬프다. 내게 베풀어 주시는 것을 가장 즐겁고 맛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었는데 남아 있는 기억들이 모두 내 관점뿐이라 슬프다.


미국이라 몸이 먼 탓도 있지만 신생아가 있어 차마 티켓을 끊지 못했다. 죽음 앞에 가장 무서운 것이 그와 상관없는 타인의 일상을 보는 것이라는데 나는 내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다는데 스스로 거리두기를 하고 말았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할매 항상 제일 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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