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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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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Aug 01. 2019

우리는 이미 본능을 이겨내는 삶을 살고 있다.

울며 태어나지만 웃으며 눈감는 삶.

오랜만에 갓난아이를 품에 안으니 참 귀엽다. 원래 세상에 없던 존재였는데 어느새 이리 자라서 꼬물대니 신기하다. 조심스레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첫째를 키울  미처 모르고 지나갔던 면들이 왕왕 보인다. 육아 상식은 깡그리 잊었지만 그래도 한 명 키워 봤다는 어쭙잖은 자신감에 여유가 좀 더 생긴 덕이다. 마치 좋은 영화를 두 번째 보는 느낌이랄까.


아이를 품에 안으면 가끔 아기가 날 알아보듯 빙긋 웃는다. 그 작은 마주침에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아, 이렇게 부성애가 커지는 것이지.' 하다가 문득 깨닫는 것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는 웃지 못한다.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아니다. 다만 즐겁고 기뻐서 스스로 그 부위 근육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흔히 '배냇짓'이라고 말하는 그 움직임들은 차라리 근육의 랜덤한 움직임에 가깝다. 마치 전신의 근육과 신경들을 하나씩 다 움직여 보는 것 같다. 세상에 나온 직후 시도하는 워밍업처럼 말이다.


반면, 울음은 이와 좀 다르다. 태어나서 코로 공기를 처음 들이켜고선 울음을 터뜨린다. 배가 고파도 울고 졸려도 운다. 심지어 기저귀를 무겁게 만든 뒤에 겉으로 발산하는 것도 울음이다.


만약 태어나자마자 별다른 가르침이나 훈련 없이 행할 수 있는 것을 '본능'이라 부른다면 울음은 본능인 셈이다. 그러나 웃음은 본능이라 부르기 어렵다. 생후 짓는 미소는 배냇짓에 불과하고 이후 상대방과의 교감 속에 짓는 진짜 미소는 '사회적 웃음'이라고 부른다. 즉 시간을 들여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 웃길 바란다. 태어날 땐 나 혼자 울고 다들 웃었지만 눈 감을 땐 나 혼자 웃고 다들 울게 되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이건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다. 가장 외롭고 무서운 그 순간에 '배운 것'을 본능보다 먼저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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