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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Sep 10. 2019

이 모든 것은 어정쩡한 영어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이라고!

1.

휴스턴에서의 일이다. 역대급 허리케인인 '하비'가 다녀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도로 곳곳이 침수가 되었지만 그래도 일부 우회로를 통해 출근을 할 수 있게 된 첫날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려던 찰나 누군가 닫히려는 문을 열고 타며 말을 걸었다. (모르는 사람이다.)


그 : 후.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야. 세상에 다운타운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고. 믿겨? 평소라면 20분이면 충분했던 거리란 말이야. 다운타운에서 여기까지 두 시간이라니! 그나저나 너는 어디서 왔어?


푸념 섞인 그의 속사포 랩 같은 말 끝에 딱 한 문장이 내 귀에 명료하게 꽂혔다. "Where are you from?" 그리고 내 입은 0.1초 만에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 : I'm from Korea.


그는 딱 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몇 초 뒤에나 다음 말을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 뭐, 이 허리케인을 뚫고 비행기를 타고 왔다니 대단한걸. 그나저나 비행기가 뜨긴 한 거야? 오늘 아침에 도착한 거니? 허리케인의 위력을 보지 못했겠군. 정말 엄청났다고.


나는 뒤늦은 수습을 했다.

나 : 아, 난 또 내 출신 나라를 묻는지 알았지 뭐야. 나는 업타운에서 왔어. 나도 두 시간이 걸렸단다. 평소엔 15분 거린데 말이야. 그럼, 오늘도 안전하게 보내라고!

그 : (바보가 내린다는 표정)



2.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끔 점심을 건너뛰고 지하 헬스장에 운동을 가는데 거기서 동료를 만나면 반갑게 손인사를 나누곤 한다. 나보다 10살 정도는 많은 형님들과 손인사를 나누는 것도 은근히 재밌다. 회의 때는 굳이 쓰지 않는 친근한 표현도 일부러 헬스장에선 쓰는데 그러면 괜히 더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루는 동료 중 한 명이 물었다.


그 : 와우, 강철근육! 여기서 보다니 반가워. 내 운동을 좀 도와주겠어?

나 : 물론이지. 자, 이렇게. 좋아! 하나, 둘, 셋. 힘내! 딱 두 개만 더 하자고!

그 : 후, 덕분에 오늘 운동을 빡세게 했군.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나 : 물론이지. 뭐든 물어봐.

그 : 여태까지 본 한국 사람들은 유독 머리카락이 풍성하던데 대체 뭘 바르는 거야?


마지막 문장이 귀에 명료하게 꽂혔다.


나 : 우린 왁스라는 것을 발라.

그 : 왁스? 그거 모발 건강에 좋아?

나 :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 : (지금 이 대화가 대체 뭔가 하는 표정)






운전은 흐름이고, 영어는 문맥이로다. 내가 늘 주장하는 그것인데, 때론 내가 내 틀에 갇힌다. 특히 우리가 학창 시절에 지나치게(!) 강조받은 대화가 끼어들 경우 그 틀을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교통사고가 나서 신음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Are you Okay?" 했더니 자기도 모르게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했다는 우스개처럼 말이다. 누가 그 사람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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