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철근육 Sep 26. 2019

때론 뜬금없는 이유로 선입견이 생기기도 한다.

미국 직장인들이 백팩을 메는 이유.

1.

선입견이라는 게 있다. 어떤 대상의 단편으로 전체를 빠르게 인식하는 사고 형태이며 상당한 경우에 A라는 대상과 B라는 대상을 비교하는 데 쓰인다. 대상은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항목에는 성별, 나이, 지역, 태도 등 어떤 것이라도 대입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선입견이 우리 삶 거의 전체에 개입하는 것만 같다. 여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진화론적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를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능력(?)을 발휘해 세상 사물들을 1차적으로 스크리닝 한다. '다가가야 하나? 피해야 하나?'



2.

몇 년 전의 일이다.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였다. 미국 국적의 직원이 재미난 얘기를 했다. "미국 사람들은 출근할 때는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 회사에 오면 구두로 갈아 신는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출근할 때 구두를 신고, 회사에 오면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나는 이 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누군가 대답했다. "아마도 미국 사람은 회사야 말로 자신의 전문성을 보여야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한국 사람은 외부에 보이는 이미지를 위해 바깥에서 더 신경을 쓰는 게 아닐까?". 다른 누군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겉보기를 좀 중시하긴 하지.'. 선입견이었다. 어쨌거나 앞서 다른 이가 얘기한 이유는 상당히 그럴듯했다. 선입견이 생성되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그러던 중 선입견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구두를 바꿀 때가 되어 이런저런 검색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밑창이 고무로 된 구두를 주로 신었다. 고무창 구두가 가볍고 편한 탓도 있지만 가죽으로 밑창을 만든 구두는 비싸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그러다가 휴스턴에 머물 때 상당히 많은 미국인들이 가죽창 구두를 신는 것을 본 기억이 나 대체 어떤 점이 좋은지 검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죽창 구두는 '홍창 구두'라 불린다. 비 오는 날에는 신지 말라고 할 정도로 물기에 약했고 무척 미끄러웠다. 닳으면 뒷굽만 갈면 되는 고무창과 달리, 바닥에 구멍이 뚫리는 형상이라 가죽창 구두는 밑창 전체를 갈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홍창 구두는 이처럼 관리가 까다롭기 때문에 차를 주로 타고 다니면서, 카펫이 깔린 실내에서 걷는 사람에 적합하다고 했다. 나는 전철을 주로 타고 다니고 아스팔트 길을 걷는 평범한 직장인 신세인 것이 안타까웠다.


그렇게 검색을 접으려던 찰나 어떤 글을 발견했다. '홍창 구두는 신발에 밑창을 잇는 방식 등에서 수작업이 필요한 경우 가격이 비싸지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러나 카펫 문화라거나 자동차 문화인 사람이 주로 신는 고급 구두라는 일반화는 무리다. 왜냐하면 고무가 발명되지 않았던 옛날에 가죽으로만 신발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때 가장 두꺼운 부위를 바닥창으로 썼을 뿐이다. 하필 그 부위가 붉은색을 띠어서 '홍창'이라고 불렀다.'. 홍창 구두는 고급 구두라는, 1차원적 형태 내 선입견이 깨졌다.



4.

미국에 왔더니 백팩을 메고 출근하는 직장인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든 것도 없는)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는 고루한 한국 사람들과 달리, 남들 시선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으로 종종 비교됐던 장면이다. 나 역시 그 장면에 동참하고 싶었다. 미국에 왔으니 실용성의 기치를 세우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비밀은 뜻밖의 장소에서 풀린다.


미국에서 회사 헬스장에 처음 갔던 날, 나는 경악했다. 옷도, 수건도, (손 비누 외) 세면도구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락커를 잠글 자물쇠도 매번 들고 가야 했다. 운동화와 손목 보호대, 샴푸 등은 회사 자리에 둬도 되었지만 운동복, 수건만큼은 그날그날 새것으로 바꿔야 했다. 운동복과 수건을 서류 가방에 넣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물 마실 텀블러에 도시락까지. 나는 백팩을 멜 수밖에 없었다.


간혹 전철을 보면 팬시한 손가방을 들고 다니는 이들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손가방을 든 반대쪽 어깨로 스포츠 백을 메고 있다. 다른 목적으로 팬시한 가방이 필요한 경우, 운동 백을 따로 들고 오는 것이다. 물론 한쪽 주머니엔 텀블러가 꽂혀 있다. 심지어 도시락 가방까지 따로 들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랬다. 그들이 백팩을 메는 이유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태도의 영향도 있지만 그에 더해 (타인이 썼던 물품 -운동복이나 수건 등-을 쓰지 않는) 헬스장 문화, (근무시간에 점심시간을 따로 빼지 않기에 생긴) 도시락 문화 등이 더불어 작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물론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문화에 대한 얘기로 파생이 가능하긴 하지만 더 이상의 확장은 하지 않겠다.)



5.

그리하여, 그들의 출퇴근 길 가방은 무겁다. 그래서 그들은 운동화를 신는다. 그러나 여전히 복장은 정장이다. 그래서 회사에 구두를 갖춰놔야 한다. 출근길에 운동화를 신었다가 회사에서 구두로 갈아 신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말로 실용만을 중시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캐주얼을 입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런 회사도 있긴 하다.)


때론 어떤 일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보다, 전혀 상관없는 사건이 더 진정한 연관성을 가질 때가 있다. 다시 한번 열린 마음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내가 발견한 이유보다 더 연관성이 깊은 항목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음을 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모든 것은 어정쩡한 영어 때문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