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미국 학교(공립학교에선 만 5세부터 다닐 수 있는 Kinder를 정식 교육과정으로 친다.)에 다니게 되면서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았다.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이 스쿨버스 탑승 여부였다. 집이 학교와 꽤나 가까워,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는 1마일의 경계에 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1.4마일 거리로 아슬아슬한 세이프였다.
물론 스쿨 버스 관련한 문제는 그 이후에도 생겨났다. 고작 두 정거장뿐인 코스라 운행 시간도 5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탑승한 아이들끼리의 세상이 있었던 것이다. 늘 같이 앉는 단짝이 있다든지, 차에 오르는 순서에 그들만의 규칙이 있다든지 말이다.
일이 있어 휴가를 낸 날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딸을 스쿨버스 탑승장으로 바래다주러 갔다. 기다리던 친구들과 인사도 하고 주변을 뛰놀던 딸이 버스에 올랐을 때였다. 일찌감치 버스에 오른 딸은 중간 즈음 좌석에 앉았다가 옆자리 친구가 뭐라 하는 소리를 듣더니 울상이 되어서 앞자리로 옮겼다.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부모는 차에 오를 수 없게 되어 있어 알 길이 없었다.
집에 돌아 와 와이프에게 들어보니 중간 좌석에 앉은 것은 고학년 언니인데 이 정류장에서 탑승하는 단짝 친구를 위해 늘 자리를 확보해 둬야 하므로 누구든 거기 앉으면 다른 데로 옮기라고 말을 한다는 것이다. 자리를 확보해 놓는 행위 자체가 옳지 않았지만, 버스 기사님도 어린 킨더 아이들이 앞자리에 앉길 권하는 상황이라 딱히 뭐라 할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그저 딸이 속상하지 않게 '그냥 앞자리에 앉으라.'라고 권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궁금함도 있었다. 왜 굳이 그 자리에 계속 앉으려 하는 걸까?
그러던 중, 바로 오늘 아침. 등교한 지 만으로 거의 한 달이 된 날, 와이프에게 연락이 왔다. 회의를 마치고 왔더니 약 10개의 톡이 연달아 와 있었던 것이었는데 웃음으로 시작하는 게 호쾌함이 묻어났다. 내용인즉슨 다음과 같았다.
딸은 오늘도 그 언니 옆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 언니는 포기를 한 건지 내 딸에게 앞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다. 같은 라인에 앉게 하는 대신 친구가 앉을 수 있게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달라고 했다. 그러나 딸은 그냥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하필 그 언니의 단짝 친구는 버스 탑승 줄 제일 마지막에 섰다. 그 언니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친구가 드디어 버스에 오르자 언니와 내 딸 사이에 겨우 자리를 잡고 갈 수 있었다. (버스 한 줄에 세명씩 태운다.)
연락을 받고 나서 내내 미소가 새어 나왔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작은 승리였기 때문이다.
딸도 답답했을 것이다. 영어로 의사소통도 아직 불편하고, 같이 어울리는 단짝 친구도 없고, 문화도 다르다. 그것을 온전히 혼자서 감내해 왔던 것이다. 그 첫 시작은 늘 스쿨버스였다. 계속 자리 옮김을 당하다가 종국엔 어디 앉아야 할지 몰라 울상이 되기도 하고, 삼삼오오 단짝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오늘 언니에게서 작은 승리를 거둔 것이다. 누구를 때린 것도 아니고, 언쟁을 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의 고집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인 내 눈에는 약간의 숭고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빠가, 응원할게. 언제나!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을 수치화 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 계량적 측면으로 행복의 '강도'와 '지속성'을 들었다. 사실 이것은 공리주의자들의 행복 셈법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문맥이 조금 달라지긴 하지만, 어떤 일이든지 묵묵히 꾸준히 하려면 지치지 않을 만큼의 강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응용할 수도 있다. 공부든 운동이든 마찬가지다. 만약 딸이 소리높여 싸우거나 울었다면 (강도 조절 실패), 혹은 이내 그 언니 옆자리를 포기해 버렸다면 (지속성 실패) 오늘의 성취는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또 그자리에 가서 앉으려 할지, 아니면 이젠 홀가분하게 다른 자리에서 편하게 갈지 모른다. 그러나 뭔가 작은 성취감이 딸에게 자리잡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