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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Oct 22. 2019

전철은 정시를 지켜야 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선입견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늘도 전철이 늦는다. 전광판에 'Delay'라는 안내도 없다. 플랫폼엔 어느새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회사 계정으로 매니저에게 메일을 쓴다. "I'm afraid I might be late for the meeting due to unexpected delay of metro."


이 전철은 심지어 싸지도 않다. 내가 사는 곳에서 직장 근처 역까지 편도 5불이 넘는다. 왕복이면 하루 11불 경인데 거의 13천 원이다. 그나마 전철역과 집/직장이 가깝기에 망정이지 그마저 멀어서 버스를 추가로 타야 했다면 시간도 비용도 더 들었을 것이다. (논외지만 이것은 내가 요새 도시락을 싸 다니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점심까지 사 먹으면 하루에 3만 원가량이 고정 지출된다.)


그래도 전철이 플랫폼에 늦게 오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약속에 늦게 됐단 사실을 모두 알게 되므로 일정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철을 무사히 탔는데도 운행하는 속도가 평소와 급격히 달라지면 조금 곤란하다. 공지사항에 뜰만큼 문제가 없는데 늦으면 그건 내 잘못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매번 전철 핑계를 대는 것도 이상하게 우습다. 진실을 말하는 것인데도 괜히 양치기 소년처럼 보일 것 같은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하루는 제대로 출발해 늦게 도착한, 즉 중간중간 서거나 속도를 늦추었던, 전철을 탔다. 정차하는 역이 늘어갈수록 평소보다 지체된 시간도 쌓여갔다. 뒷좌석 아저씨가 이를 꽉 물고 나지막하게 되뇌었다. "This stupid thing NEVER allows me to be on time.".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순간 머리에 한국말로 중얼거린 것과 맥락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지만 그 아저씨 표정이 너무 험악해서 참았다.


어쨌든 오늘 20여분을 넘게 기다려 전철에 오르는데 기관사가 딱 한마디 한다.

"Sorry for the delay. And this is xxxx line train to xxxxx."


왜 늦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전철이 시간 개념에 이토록 정확하지 않아서야 되겠나.'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전철은 정확한 시간 개념을 가져야만 하는가?


전철은 정해진 궤도 위를 달린다. 그러므로 차도 위 자동차처럼 막히거나 할 우려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시간 개념이 정확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은 그렇다. 다음 역까지 이동하는 데는 소요되는 시간도 평균 2분으로 균일하다.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지 매 역마다 전철 도착 시간이 정해져 있기까지 하다. '엇, 지금 사무실에서 나서면 막차를 탈 수 있어!'라며 뛸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러나 전철=Punctual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연결고리가 아니다. 전철도 중간에 얼마든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역에서 머무는 시간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요금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금액이라는 것은 없다. 심리적 저항선을 지키면서 (며칠 전 한국돈으로 50원 정도의 요금 인상에 테러가 일어난 칠레 일화를 생각해 보자.) 최대한으로 가격을 올린다면 얼마든지 이익을 볼 수도 있다.


정시성을 지키면서 낮은 요금을 유지하는 것은 한국 전철이라서 그렇다. 그게 국민들의 요구사항이 반영된 것이든, 회사의 운영 철학이든, 국가의 정책이든 간에 상관없이 어쨌거나 우리 나라니까 누릴 수 있는 혜택 중 하나라는 말이다.


주말에 일정이 있어 외출을 하려다가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이면 차키를 두고 전철역으로 향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게 얼마나 큰 혜택이었는지 비로소 실감한다.


전철과 정시성을 연결 짓는 것. 나아가 저렴한 교통수단이라는 이미지와 연결하는 것. 이들 역시 또 하나의 선입견이다. 대체로 긍정적인 이미지이지만, 그 때문에 작은 실수나 오류 하나에도 그만큼 욕을 먹기도 한다. 혹자는 익숙함이 낳은 현상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땐 선입견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로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전철이 정시를 지켜야만 한다고 얘기했는가?

정시를 지켜줘서 당연한 게 아니라 고마운 일이다.



https://brunch.co.kr/@crispwatch/270

https://brunch.co.kr/@crispwatch/259





선입견을 버리는 데 가장 좋은 전략은 남을 믿는 것이다. 너무 믿어서 사기 당하고 하는 그런 믿음 말고.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다들 생각이 있더라. 아니면 뭔가 사정이 있거나.'


아는 어른께서 하신 말씀인데 바로 이런 사고 방식이 선입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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