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철근육 Oct 25. 2019

We survived!

아이와 노숙자.

그는 노숙자임에 틀림없었다. 옷은 깔끔했지만 돈을 구걸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전철에 오르자 주변의 사람들이 외마디 비명을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시작했다. 아마도 그런 장면이 익숙한 듯했다.


-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입니다. 저는 95센트가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 누군가가 1달러를 주신다면 제가 5센트를 거슬러 드릴게요.


미국은 길에서 노숙자 보는 게 어렵지 않은 나라다. 이런 방식의 요청도 낯설지 않은지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5센트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냥 1달러를 달라고 하지 왜 자기가 가지고 있는 5센트를 거슬러 준다는 걸까. 문득 '은전 한 닢'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아무런 호응이 없자, 그는 근처에 앉아있던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아빠와 단 둘이 전철에 앉아서 가고 있는 중이었다.


- 안녕 귀여운 아가야. 손에 들고 있는 건 뭐니?

- 금붕어예요! (They are gold fishes.) * 진짜 금붕어가 아니라 체다치즈 맛이 나는 물고기 모양 과자였다.

- 내가 그중 몇 마리를 받을 수 있을까?

- 안돼요.

- 그래그래. 나도 농담이었단다. 맛있게 먹으렴 귀여운 아가야.


몇 분 뒤 2살 반이라고 알려진- 그 아이의 혀 짧은 대답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이 폰에서 책에서 눈길을 떼고 고개를 들어 그 노숙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여기요.

- 오, 정말 고마워요. 신의 가호가 있길!


누군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에 짤그랑 소리를 내며 동전을 주었다. 그는 벙글벙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입니다. 저는 85센트가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 누군가가 1달러를 주신다면 제가 15센트를 거슬러 드릴게요.


은전 한 닢이 다시 생각나려던 찰나 전철은 어느 역에 당도했고, 그때 내리던 사람들 중 몇이 곱게 접은 지폐들을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역시나 벙글거리며 전철에서 내렸다.


그 전철은 플랫폼이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편하게 반대쪽 차량으로 옮겨 탈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반대 방향 몇 정거장 만큼의 영업을 위해 다시 전철에 몸을 싣는 장면을 봤다.




전철이 지하 구간을 지나 지상으로 나왔을 때 그 아이가 무척 흥분해서 외쳤다.


- 만세! 우린 살았다! (We survived!)


아마도 어두운 전철을 보고 아이가 무서워 하자, '얼른 밝은 데로 도망가서 살아야만 하는 게임'처럼 아빠가 아이를 달랜 건지도 모르겠다.


폰과 책을 바라보던 눈길들이 다시 위를 향했다. 이번엔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다들 자기도 모르게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해가 지는 시각이었지만 지평선의 붉은빛은 해가 뜨는 것처럼 보였다.





노숙자와 아이의 대화를 막지 않은 아이의 아버지는 나보다 젊었지만 훨씬 더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를 보며 내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다.

https://brunch.co.kr/@crispwatch/162


매거진의 이전글 전철은 정시를 지켜야 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