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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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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Oct 16. 2019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넉넉하게 봐도 10% 정도가 아닐까?

1.

대학교 때의 일이다. 몇몇이 과방에 모여 노동자 계층이 살아가는  대해 토의하고 있었다. 똑똑 사람들 어떤 지식을 가지고 어떤 얘길 하는지 궁금했던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귀만 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대화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디킨스. 디킨스를 읽어보라고. 영국 산업혁명기 노동자 계층의 삶을 잘 다뤘으니까. 지금 노동자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나는 디킨스라는 대단한 사회학자가 있는 줄 알았다. 그 이름 한 마디로 토의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2.

원래 독서량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내 학창 시절의 지방은 조건이 취약했다. 지어 교과서 한 권 사기도 어려웠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문과생들모두 선택과목으로 '회문화'를 골라야 했지만 나는 이와 별개로 '경제'를 더 공부하고 싶다. 그데 그 교과서  권을 사기 위해 옆 도시까지 나가야 했다. (내신을 위해 '사회문화'를 공부하고, 수능을 위해 '경제'를 혼자 따로 공부했다.) 이렇게 자료가 취약하다 보니 내가 취한 전략은 1) 본 책 또 읽기, 2) 언어영역 문제집 지문을 책이라 생각하고 읽기 정도에 머물러야 했다.


대학에 진학하고 서울의 인프라를 접하게 되면서 내 독서량 비약적으로 증가다. 그럼에도 디킨스는 끝내 졸업 때까지 안 읽다가 사회인이 되고서야 "위대한 유산"으로 처음 접다. 그가 사회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 그의 필력과 재치에 나는 오히려 바로 팬이 돼버렸다.


그러나 그때 그 발언을 했던 학우의 목소리는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디킨스를 읽으면 노동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


그의 생각과 현실 간의 괴리가 여전히 크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가 바로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3.

아버지는 늘 파란 잠바를 입고 출근하셨다. 정말 이른 시각에 통근버스가 데리러 왔고 회사에 내리시면 자전거를 타고 공장으로 이동하신다고 했다. 아버지는 용접 쪽이라 딱히 기름내를 풍기거나 하진 않았지만 열과 함께 하는 일이라 늘 덥다 하셨다.


'아부지. 내가 만약에 공부를 안 한다 하면 어쩌려고 했어요?'

'내가 일하는 곳에 하루 앉혀보고 그다음 날에 저기 박 대리 일하는 시원한 사무실에 앉혀보려 했지.'

'그래도 내가 아버지 일하는 데가 좋다고 하면?'

(웃으며) '뭐, 별 수 있었겠나. 일을 잘 가르쳐 줬겠지.'


파란 잠바의 아버지는 일을 무척 사랑하셨다. 어려운 형편 탓에 학업을 길게 이어가지 못한 당신을 취직시켜준 곳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덕에 엄마를 만나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려 이렇게 따순 집에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4.

요행히도 나는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다. 래서 좋은 대학에 갔다. 고시공부를 하긴 했지만 학점도 준수했다. 군 제대 후엔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이직도 늦은 나이임에도 큰 탈 없이 성공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순탄한 삶이다.


그래서 주변에선 날 보고 무척 곱게 자란 삶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 할 것이다.'라는 선입견은 생각보다 쉽게 잡혔다. 그들은 나보다 못나 보이는 자신의 삶에 내재된 부당함에 대해 항변하기도 했다.



5.

7살 꼬마였던 시절, 어느 날 아버지 손을 잡고 버스에 올랐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허허벌판이었다. 그곳을 뿌듯하게 바라보시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봐라. 이 넓은 땅에 엄청나게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 설 건데 거기 우리 집이 있다."


그 집은 온전히 우리 것이 아니었다. 20평도 안 되는 장기 임대 주택이었다. 얄밉게도 좀 더 넓은 평수의 분양 아파트가 같은 단지 내에 있는 곳 말이다.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박하게 잘 지내던 우리 집은 예전 어떤 글에서 지나가듯 얘기한 것과 같이 집안 전체가 망하는 바람에 나는 기를 쓰고 국립대에 가야만 했다.

https://brunch.co.kr/@crispwatch/203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수준의 학점을 받았던 것은 장학금을 반드시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취직과 늦깎이 재취업에 성공했던 이유는, 학벌과 학점 도움도 있지만 그 시절을 이해해 주신 면접관들 덕분이었다.


남들 보기에 순탄해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은, 와이프와 많은 대화를 하며 어려움들을 조화롭게 풀어가려 애쓰는 대신, 외부로는 딱히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6.

나는 노동자의 가정에서 자랐다. 가난하진 않았지만 가난이 어떤지 남들보다 너 밀착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여권을 만들고 해외를 간다는 행위가 엄청나게 부자가 되어야만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다. '자가용을 한대 사면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내 차를 샀지 뭐냐.'라고 싱글벙글 대는 부모님 아래서 자랐다. 영어나 인수분해나 모두 그냥 학교에서 배우고 책으로 배워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7.

사람들은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나오는 대사를 보고 감동받는다.

'너는 똑똑해서 '천지창조'가 언제 그려졌고, 어떤 화풍을 따랐는지 금세 줄줄 읊을 수 있겠지. 하지만 시스티나 대성당의 그 웅장함을 직접 본 황홀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


그러나 이내 자신의 삶에서는 간접 경험한, 혹은 추측한 몇 가지 항목을 가지고 성급한 추론이나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 의견에 동조하거나 반박하지 않으면 생각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실수를 범한다. 내가 아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바라보는 시야가 전체를 아우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8.

나는 노동자의 가정에서 자라 명문대를 나왔다는 인생역전 신파극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의 삶에 관련한 책도 남들 만큼은 봤고, 그에 관한 고민을 남들 만큼은 했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그들의 삶을 지척 지간에서 보았다. 그럼에도 조심스럽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게 맞는지. 섣부른 판단에 더 큰 혼란만 가중하는 것은 아닌지 등 말이다.



9.

정치 철이 되면 아버지는 아직도 근로자 정책에 대한 공약들을 꼼꼼히 보신다.

'이렇게 나라도 한 표를 보태야 내가 사는 공간, 내 동료들이 더 행복해지는 데 가까이 다가가지 않겠나.'

그렇지만 가족들에게 누구를 뽑았는지 얘기하지도 묻지도 않으시고 각자의 의견을 존중해 주신다.


나는 다행히 좋은 부모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썩 좋지 못한 환경이었음에도 분노나 반감 없이 자랐다. 살을 부대끼고 뺨을 비벼대는 정은 없었지만 (그런 여유가 없는 삶이다.) 그래도 나로 하여금 최대한 열린 사고를 갖도록 옆에서 도와주셨다.



10.

브런치를 만들고 글을 계속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줄기가 존재한다.

1) 누군가 나처럼 먼 길을 둘러 오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이정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과,

2) 내가 직접 경험한 것 이외의 안건에 대해서는 최대한 조심하자는 열린 마음을 강조하는 것(주로 겸손한 마음으로 표현한다.)이다.


* 심지어 경험한 일에 대해서도 늘 조심하고 유의하며 의견을 내야 한다. 내 경험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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