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를 피/아의 구분이라고 본다면 처음 언급한 The Economist의 기사가 갖는 맥락이 더 와 닿는다. 편 가르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금 불안한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쉽게 값싼 수입품이나 기계로 대체될까 봐, 그리고 철옹성같이 높게 둘러싸인 '그들만의 공간'에 내가 들어갈 수 없을까 봐 불안한 것이다. (각주 2)
자, 그렇다면 경제와 정치와의 관계는 이러한 편 가르기로 인해 완전히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거에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가 뚜렷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코노미스트 기사에 따르면 선거를 앞둔 일정 기간 GDP의 성장률이 어떤가에 따라 현재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유관하게 바뀐다고 되어 있다.
이는 심리적으로 보면 '지금 살기 좋으니 지금 정권을 지지한다.'라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단순 통계만 보고 단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각주 3)
거시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 경기 순환 (Business Cycle)을 논하면서 이러한 '정치적 사이클 가설'을 꼭 한 꼭지로 다루곤 한다. 하지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란을 피할 수 없고, 인위적인 정책 조절에 의한 왜곡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론으로서 정합성을 띠긴 어렵다.
임기 말에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펴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이해하기 쉽다. 이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개입하는 셈이다. 그리고 무척 흥미롭게도, 그 결과가 의도치 못한 방향으로 나올 수도 있다. 확장적 재정 정책을 폈다가 물가만 오르고 실업률은 잡지 못해 국민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쪽이 됐든 이런 상황을 이론화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므로 사실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은 예전에도 이론화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방향에서 이를 바라봐야 한다.
바로 '정책(정치)이 다뤄야 하는 경제의 분야가 어딘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많은 나라가 포퓰리즘을 지향한다. 이는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상관없이 확대되는 추세다. 편 가르기는 경제든 정치든 안보든 좋을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너도나도 이 대세를 따르고 있다. 국내 단합이 안되면 해외에 공동의 적을 만들어분노를 표출케 하면서라도 분열을 방지했던 과거 여러 나라들의 일화를 생각해 보면, 분명 작금의 현상은 좀 기이하긴 하다.
국내 불안정성을 방치하는 국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나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어떤 나라는 순순히 경제적 목적에서 그럴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이를 조장하는 분위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불안정성을 계속 지속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각주 4) 물론, 저소득층을 어떻게라도 세뇌를 하여 불만을 틀어막는다면 가능하겠지만, 현재와 같은 정보화 시대에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후부터의 논의는 본인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띨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내 선호가 반영된 하나의 예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1. 가장 큰 전제는 부의 재분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양극화가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이는 내가 '결국 생산이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논리다. 모두가 코딩을 하며 4차 산업의 주역이 되고 싶어도 누군가는 결국 코딩을 담는 PC를 만들어야 하듯, 부자들이 영원히 부를 독식하고 싶어도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지금의 양극화를 어느 정도라도 해소하여 그들의 불만을 가라앉혀야 한다.
2. 가장 크게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그 방식이다.
경제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세금을 조금 더 높여 이를 복지 재원으로 쓰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형평과 공평을 더 중시한다면 이보다 더 급진적인 방식도 있다. 생산된 것을 일단 국가에서 취합한 뒤 이를 고르게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방식에는 발전에 대한 유인이 부족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그는 통상 '중도 우파'로 분류되는데, 그 방식이 재미있다. 경제/ 복지에 대해 모두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중도가 아니라, '경제는 우파', '복지는 좌파'라는 형식으로 저울의 균형을 맞춘다. 그래서 기업의 자율성을 강화하면서 복지나 교육에 힘을 쓰는 재원을 마련한다.
사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은 아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비교하자면 경제학에서 말하는 '케인즈 주의'와 대동소이하다. 시장의 힘을 믿되 필요한 경우 정부가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역할은 시장의 왜곡이 아니라(즉 가격의 왜곡이 아니라), 확장 재정/ 복지 정책 등으로 분류된다. (재정 정책 자체를 시장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에는 어쩔 수 없지만.)
어쨌거나 지나친 개인주의에 기반한 경쟁을 앞세우는 미국과, 나라는 부자여도 국민은 가난한 일본 사이 그 어디쯤 우리가 표방할 수 있는 모델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각주 1 : 사실 이런 측면에서 베네수엘라도 엄연히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어떤지 조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편을 가른다는 측면에서 좌/우 모두에 해당할 것 같다.
- 각주 2 : 아이러니하게도 철옹성 안쪽 사람들도 스스로 더 독립된 공간을 만든다. 그들만을 위한 헬스클럽, 그들만을 위한 독서실, 그들만을 위한 수영장이 고급 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자신들을 향해 날을 세우는 상대편을 달래기보다 더 자극하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 각주 3 : 모든 상관관계(Correlation)가 인과관계(Causality)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특정한 기간만 다룬다면 일반화는 더욱 어렵다.
- 각주 4 : The Gardens of Democracy를 쓴 저자 중 한 명인 기업가 닉 하나우어(Nick Hanauer)는 Ted에서 "본인도 부자지만, 이 상태 그대로 유지한다면 저 멀리서 낫을 들고 봉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서 분명 지금의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