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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Jan 14. 2020

카드 돌려막기로 배우는 ALM

부제 : 로또가 꿈이 될 수는 없잖아요.

사회생활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누군가 얘기했다. 


자, 지금 내가 신용카드로 100만 원 현금 서비스를 받아.
만기가 돌아오면 다른 카드로 100만 원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막고
그 만기가 돌아오면 또 다른 카드로 100만 원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막는 거야.
이런 식을 반복하면 그 100만 원은 누구도 갚지 않아도 되는 내 '잉여' 돈이 되지.
만약 그게 100만 원이 아니고, 몇 천, 몇 억이라면?


만약 위 얘기에 귀가 솔깃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십중팔구 신용카드를 한 번도 안 써본 순진한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다. '사기꾼이라니 거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폰지 사기가 정확하게 저 개념이기 때문에 달리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다. 


솔깃한 투자 제안을 해서 사람들을 모은 뒤, 나중에 가입한 사람 돈으로 앞선 사람들에게 이자를 지급하는 식의 사기 프레임이 폰지 사기다. 윗돌 빼서 아랫돌에 괸다는 관점에서 카드 돌려막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전략이 통하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빌리는 이자가 갈수록 높아지고, 갚아야 하는 만기가 갈수록 짧아지기 때문이다. 


1번 카드 100만 원은 2%에 빌렸는데, 이를 갚으려고 2번 카드 현금 서비스를 받았더니 4%를 내라고 하면 이자 때문에 내가 실제로 빌리는 돈은 갈수록 줄어드는 셈이다. 결국 100만 원 빌려서 100만 원을 갚는 무한 루프가 아니라, 100만 원을 갚기 위해 98만 원을 겨우 빌리고, 또 98만 원을 갚기 위해 94만 원을 겨우 빌리고 하는 식이다. 


만기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1년을 줬다면 갈수록 이게 줄어들어 나중엔 단 며칠 만에 현금 서비스를 갚아야 한다. 융통할 수 있는 금액은 줄어드는데 앞선 돈을 갚아야 하는 시기는 빨리 도래한다. 첩첩산중이다.


그러므로, 카드 돌려막기로 '내 잉여의 돈'을 만들 수 없다. 이건 명백하다. 




기업 운영에서 이 개념을 도입한 게 ALM이다. Asset Liability Management의 약자로 자산, 부채 관리 - 즉, 재무상태표(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 관리한다는 내용이다. 이게 기업에서 중요한 이유는, 개인에게 카드 돌려막기가 위험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순전히 자신의 돈 만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 대부분은 자기 돈에다 외부에서 융통한 돈을 더해서 사업을 영위한다. 회사채를 발행하든 은행에서 차입을 하든 말이다. 


자, 당신이 사장이 되었다. A은행에서 1억 원을 만기 6개월, 3%의 이자로 빌려왔다. 당신은 제품을 만들어 고객에게 1.2억 원에 팔았다. 맙소사, 엊그제까지만 해도 돈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서 사업을 하나 전전긍긍했는데, 지금은 매출 1.2억 원을 달성한 회사의 사장이 된 것이다! 게다가 원금에 이자를 지급하고도 돈이 남는다!


그러나 만약 고객이 8개월 뒤에나 돈을 줄 수 있다고 얘기를 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매출 1.2억 원을 달성했다고 여전히 웃을 수 있을까? 고객이 8개월 뒤에 정말로 돈을 입금해 줄지 걱정되는 것보다도 훨씬 이전에 은행에 돈을 갚아야 시점이 돌아온다. 만기 관리의 실패다.


지난 사업에서 교훈을 얻은 당신은 만기 관리에 신경을 썼다. B은행에 겨우 얘기해 만기 6개월, 이자율 5% 조건으로 1억 원을 다시 빌렸다. 그러나 도통 거래선이 발굴되지 않는다. 돈을 놀리기 뭣해서 일단 예금에 넣어뒀다. 만기는 6개월로 맞췄지만 금리가 2%밖에 안된다. 그래도 이자를 버니 이게 어디야! 할 것인가? 이자율 관리의 실패다.




무슨 이런 쉬운 얘기를 거창하게 얘기하나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내 해명은 다음과 같다.


우선, 기업이 커져서 무수히 많은 다양한 종류의 거래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때도 지금처럼 '쉽군!' 하며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부채뿐 아니라, 채권/ 채무의 금액, 만기를 넘어 돈을 받지 못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 모든 거래선 별로 나눠서 말이다.


만약 ALM에 실패하여 돈이 더 필요할 경우 이자라도 갚자면 현금 흐름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막히는 순간 기업은 도산한다. 신용경색을 혈관 경색에 빗대어 얘기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다음 해명은 조금 다른 맥락이다. 우린 어떤 개념이 쉽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그것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ALM은 사실 모든 사람과 가정에 필요한 개념이다. 작게는 '보너스로 대출금을 갚을까 예금을 들까?'하는 고민부터, 뉴스를 보다가 '어라 어제까지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던 어떤 사람이 오늘 갑자기 망했네.'하는 순간까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후자의 예를 조금 더 곱씹어 보자. 우리는 고급 시계를 차고 슈퍼카 핸들에 올린 손만 보면 안 된다.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봐야 한다. 즉 저 차와 시계(=자산)를 사기 위해 내 돈(=자본)과 빌린 돈(=부채)의 비중이 어떻게 되며, 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자산과 부채를 관리하고 있는지(=ALM)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것에 대한 고려가 없이 그저 그런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라면(='나도 저 차가 타고 싶어!'),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 꿈은 로또 당첨입니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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