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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Dec 29. 2017

영웅 vs 악마

한국에서 이 시스템을 차용할 수 있을까?

0. 잡상의 발단


미국에서 머물 때 일이다. 휴가차 들른 어떤 곳에 선불 주차장이 있기에 그곳에 차를 댔다. 출입을 막는 장치가 전혀 없고 주차를 한 사람들이 자진해서 금액을 납부해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넉넉잡아 5시간치 금액을 지불했지만 마지막에 들른 식당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5시간이 좀 지나고야 주차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딸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내 차로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와이프의 경고에 나는 그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기다리라는 나의 외침을 듣고 차 앞바퀴 쪽으로 숙인 몸을 일으키던 그는 내게 회심의 한 마디를 던졌다.


Good luck.


그의 손에는 거대한 자물쇠가 들려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자물쇠를 채우는 순간 수백 불이 그냥 나간다는 사실을. 그의 한 마디 속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현장이었다. 한 번 걸리면 엄청나게 큰 금액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적은 금액은 자진해서 제대로 납부할 수 있는 체계였다.




1. 회사에 영웅이나 악마가 필요할까?


일벌백계의 효능은 그것이 갖는 효율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사례에서만 보아도 손에 꼽는 효율이 몇 가지가 된다. 주차장에 따로 출입을 방지하는 장치를 설치할 필요가 없고, 주차비를 받는 직원을 상시 대기시킬 필요도 없다. 주차료 납부는 앱이나 기계를 통해 알아서 잘 되고, 선불제이다 보니 주차장이 받는 금액은 무조건 주차된 시간보다 많거나 같다. 더구나 시간을 어겼을 때 추가된 주차료와 더불어 엄청난 벌금까지 받을 수 있다.


회사에 이와 유사한 효능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영웅', 그리고 '악마'다. 영웅이 있으면 그 파급효과는 크다. 일단 그가 보여주는 업무 퍼포먼스는 회사의 실적과 직결된다. 그를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역량을 제고하는 동료들의 순기능은 덤이다. 


악마는 정의 내리기 애매한데, 꼰대나 사이코 상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되레 회사에서 보여주는 일벌백계를 말한다. 누군가 작은 실수로도 엄청난 징계를 받게 된다면 모든 직원들이 사소한 규정도 잘 지키게 될 것이다. 위의 주차장 일화와 같은 맥락이다. 경제학 게임이론에서도 비슷한 전략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효능이 많은 영웅과 악마를 왜 모든 회사에서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보면 배트맨을 흉내내는 일반인들이 나온다.




2. 한국이라서 그런 것일까?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소위 말하는 초고속 승진의 케이스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유수 CEO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xxxx 년에 이 회사에 들어왔죠. 그때 실적이 우수했던 저는 3년 뒤 바로 부서장으로 발탁이 되었고, 이후 전략팀 임원이 된 뒤  2년 후에 이사회에서 CEO로 선임이 되었지요.". 이는 영웅의 사례인가?


반면 한국은 그런 사례가 적다. 창업자가 빠른 직위 변경을 하거나, 대기업 총수 일가가 이른 승진을 하는 것 외에 일반적인 직장인들이 초고속 승진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진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직급별로 1년씩이다. 전체 업무 기간을 더해도 남들보다 4~5년 정도를 빠르게 가는 것이 상한이다. (물론 그것도 엄청나다.) 한국이라서 그런 것일까?  




3. 어떤 시스템을 차용하느냐의 문제다.


정답은 두 가지 관점에서 달리 봐야 한다. 외국은 초고속 승진을 인정하는데 한국은 아닌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단순히 영웅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의 문제냐면 대답은 Yes에 가깝다. 외국은 나이/성별/직급별 연한에 관계없이 해당 직급에 맞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면 그 자리에 앉힌다. 반면 그 자리에 필요한 역량에서 부족해지면 바로 내보낸다. 채용의 기준이 직급과 역량의 matching에 있다. 


반면 한국은 직급과 필요조건을 matching 한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조건에는 그 이전에 거쳐야 하는 직급에서의 경험 (직급별 필수 연한)을 포함한다. 연공서열적인 방법이므로 당연히 나이도 어느 정도 고려가 된다. 즉, 외국에 비해 역량을 좀 더 넓게 정의한다거나 역량 이외의 것을 요구한다고 불 수 있다.


시스템을 기준으로 표현을 하자면, 외국은 단순한 기준을 차용한 시스템인 반면 한국은 조금 복잡한 기준을 차용한 시스템인 셈이다. 




4. 예시 하나 더.


얼마 전 인터넷에 미국은 스쿨버스가 서면 양쪽 차선의 차량이 모두 정차하는 사진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존중하는 문화로 이를 설명했지만 시스템으로 설명하면 조금 달라진다. 


미국에서 운전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STOP'사인 앞에서 무조건 정차하는 것을 무척 강조한다. 경찰차도 어느 귀퉁이에 숨어있다가 STOP 사인을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벌금을 물린다. 대신 다른 항목은 상당히 관대하다. 좌회전은 비보호인 경우가 많으며, 도로 기본 속도도 한국보다 높다. 


그런데 STOP 사인 앞 무조건 정차라는 행위 하나가 갖는 효용이 꽤 크다. 그로 말미암아 그물처럼 얽힌 복잡한 주택가에서도 STOP 사인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차량 운행이 상당히 수월해 진다. 4거리일지라도 내가 진행하는 방향(남북)에 STOP 사인이 없으면 그냥 제 속도로 가면 된다. 다른 방향(동서)에 STOP 사인이 있으므로 반드시 그쪽에서 오는 차량은 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STOP 사인을 무조건 지키는 문화가 형성이 되면 다른 일들도 쉬워진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은가? 스쿨버스에 STOP 사인을 달면 된다. 스쿨버스가 섰을 때 양방향 차들이 모두 서는 것은, 그들 눈 앞에 STOP 사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정지 표지판 준수 의무가 미국보다 덜한 대신 좌회전 신호가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 우회전은 조금의 재량이 있고, 도로의 규정속도가 미국보다 조금 낮다. 경찰에 걸려도 뭔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측면도 많다. 어떤 특정한 하나를 강조하기보다는 두루두루 챙기는 시스템이다.




5. 그래서 결론적으로 영웅과 악마가 필요한가?


외국은 시스템이 단순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영웅이 등장한다. 이직(퇴직) 문화가 우리보다 널리 퍼져있다. 그래서 악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시스템이 더 복잡하다. 그래서 영웅을 배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체계를 띤다. 대신 드러내 놓고 악마를 현시하지도 않는다.


회사도 문화의 일부분이다. 요즘 세상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들어와 취업을 했거나 외국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몰라서 외국의 체계를 차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대신 문화의 한 구성원으로서 아직은 제도 변화를 급격하게 하기에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회사가 급격한 인사이동 (초고속 승진, 빠른 해고) 체제를 도입했다고 하자. 그 혜택을 보는 직원도, 그 피해를 보는 직원도 모두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다. 회사 내부 체제 말고 외부의 법에도 영향을 받는다. 회사의 움직임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정답은 우리가 스스로 조금씩 바꾸는 수밖에 없다. 거대한 혁신도 세상을 바꾸지만 때로는 우공이산의 우직함이 필요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좋은 의지를 가지고 좋은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사내에 더 많아지도록, 그래서 사회의 규율에 어긋나는 악마를 만들지 않아도 우리만의 영웅이 많이 생겨나도록 하루하루씩 바꿔나가야 한다. 


모든 직장인들 한 해 또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에 좋은 일 가득하시길. 그리고 한 해치만큼 더 나은 직장과 사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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