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1)
지난 시리즈는 이 글 마지막에 링크를 걸겠다. 마음속 부채를 떨 겸 (4) 편을 적어본다. 예정대로 글쓰기에 대한 것 중 첫 번째다. 내가 글쓰기를 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잘 쓰는 사람들로부터 배운 조언들을 정리해 두는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이것이다. 모든 일에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인터넷에서 두괄식 보고서 구성을 강조하는 많은 자료들을 보고 억지로 모든 글을 두괄식으로 적으려다가 되레 낭패를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이 밖에 많은 아이디어들도 언제든지 환영이다. 참고로 기술적인 부분은 생략한다. 문장을 짧게 쓴다 / '의' 사용을 줄인다 / 수동형을 쓰지 않는다 / 등이 아니라 글이 가지는 '구성'에 대해 집중하려 한다.
글은 누군가로 하여금 그것을 읽게 하기 위해 쓴다. 일기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내가 읽는다.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는 다르다. 무언가의 위치를 생각할 때는 항상 4차원이 필요하다. 가로(위도), 세로(경도), 높이, 그리고 시간이다. 지금의 내가 쓰는 일기는 미래의 나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 쓴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회상하면서 감정적인 것이든, 까맣게 잊고 있던 지식이든 무언가를 되짚을 수 있다.
다른 글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주기 위해 쓴다. 나든 타인이든 말이다. 그래서 글에는 항상 읽는 사람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회사에서 주로 쓰는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1) 열거식 구성
새로 임원이 부임을 했다. 우리 부서가 진행하는 일들에 대해 업무 보고를 해야 한다. 새 임원은 사전 지식이 전혀 없다. 이런 경우엔 열거식이 도움이 된다.
부서를 나열하고, 각 부서가 하는 업무를 나열하고, 해당 부서의 손익이 어떠하며, 각 부서들이 어떤 현안을 갖고 있는지 제시하는 형식이다.
① A-A'-A''-A'''-B-B'-B''-B'''-C-C'-C''-C'''
② (A-B-C)-(A'-B'-C')-(A''-B''-C'')-(A'''-B'''-C''')
①과 ② 중 어떤 형식을 취하든 상관없다. 부서와 업무의 개수, 중요도에 따라 취사선택하면 된다.
2) 시점별 구성
아주 오래된 기간 동안 진행된 안건이 있다고 하자. 임원이 그 안건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오래 지연된 탓에 어쩌다 이렇게까지 흘러왔는지 감이 안 잡힐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시점별 구성이다.
① 현재(현안의 발생) → 과거 설명 (시작 → 흐름)
② 시작 → 흐름 → 현재 (현안의 발생)
만약 단순한 정보 보고라면 ②가 유리할 것이다. 반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는데 새로운 현안이 발생하는 바람에 묻혀있던 건을 되살려 내는 것이라면 ①을 써도 무방하다.
3) 논리적 구성
새로운 사업을 제안한다든지, 결정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의견을 내는 경우에는 논리가 필요하다.
① 안건 설명 - 1안 제시 - 1안 근거 - 2안 제시 - 2안 근거 -...
② 안건 설명 - 제안 종합 제시 - 1안 근거 - 2안 근거 -...
여기서 말하는 근거는 3단 논법에서 말하는 종류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현실 보고서에서 근거라 함은 대부분 '자료(Data)'를 제시하는 형식을 띤다. 수치, 경쟁사의 활동, 업계의 현황 등을 분석한 데이터도 이에 해당한다.
4) 동향 보고의 경우
시황이 급변했다든지, 특정 거점에 인사상의 변동이 생겼다든지, 거래선의 입장이 바뀌었다든지 등 동향을 보고할 때가 있다. 짧은 출장을 마치고 작성하는 출장 보고도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는 대부분 현황을 최대한 상세하게 적는다. 뒤에 자신의 의견을 추가할 수도 있지만 유의해야 한다. 자칫 의견을 Fact와 구분하지 못하면 오해를 사기 쉽기 때문이다.
인사상의 변동에 대한 동향 보고를 예로 들어보자. A가 공장을 그만두었다. 이것이 Fact다. 그리고 주변 얘기를 들어보니 '가정 형편 때문에 더 나은 급여를 준다는 곳을 찾아갔다.'는 소문이 있었고, '평소에도 회사에 대한 불만이 있긴 했었다.'는 말도 들린다 하자. 이를 구분해서 작성해야 피보고자가 이를 보고 알아서 판단을 할 것이다. '평소 회사에 대한 불만이 표출하며 더 나은 급여를 제시하는 기업이 나타나자 즉시 퇴사를 결정했음'이라고 쓰는 것과 천지 차이다. 극단적인 예인 것 같은가? Fact와 판단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런 착오는 생각보다 많이 발생한다.
세상 모든 일에 단정적인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 나도는 말 중, 보고서는 '무조건' 두괄식이어야 한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두괄식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글을 읽는 사람(피보고자)은 대체로 바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선 핵심이 무엇인지부터 보고 싶어 한다.
따라서 보고서의 결론을 무조건 앞에 내세우고 논리를 후술 한다.
여기서 파생되는 원칙은 대체로 이런류다.
피보고자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매력적인 결론을 써라.
결론 부분을 두꺼운 글씨체로 강조하라.
이 말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피보고자는 바쁘다'는 것뿐이다. 즉 글을 읽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한 부분이다. 나머지는 절대원칙으로 받아들이면 위험하다. 특히, 파생된 원칙은 모두 지워버려도 무방하다.
두괄식 보고서가 도움이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① 피보고자가 이미 그 안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경우 (읽는 사람)
②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한 경우 (구성)
위의 두 조건은 AND 조건이다.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두괄식이 적합하지 않다. 무턱 댄 결론 제시에 "이에 대체 무슨 소리야?"라는 반응이 돌아올 수도 있다. 두괄식이 적합하려면 읽는 사람과 구성의 조합이 동시에 필요하다.
읽는 사람(피보고자)이 안건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아래의 구성 정도가 두괄식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2) 시점별 구성 중 ①
3) 논리적 구성 중 ②
열거식과 동향보고의 경우 두괄식으로 적기에 애매한 구성이다. 열거식은 국어시간 표현을 빌리자면 '설명문'에 가깝기 때문에 '결론'이라고 하는 단락 자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동향 보고는 '결론'이라고 하는 항목에 대부분 '의견(혹은 판단)'을 적게 되는데 이는 앞서 말했다시피 Fact보다 앞세우기 조심스럽다.
1) 요약 페이지
가장 현실적으로 수월하게 쓰이는 것은 요약 페이지다. 컨설팅 회사와 업무를 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컨설팅을 시작하기 전에 작성하는 제안서 자체부터 대부분 기백페이지에 달한다. 그래서 이들은 앞에 두세페이지 정도로 요약을 제시한다. 보통 Executive Summary라는 표제를 단다. 다른 보고서에도 이를 차용할 수 있다. 각자의 목적에 맞는 구성으로 글을 쓰되, 앞에 요약 페이지나 단락을 하나 제시하는 것이다.
간혹 이를 두고 두괄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불성설이다. 두괄식은 구성의 한 방식이다. 요약 페이지를 앞에 두는 것은 흐름과 상관없는 하나의 실무 팁일 뿐이다. 두괄식이라 일컬을 수 있으려면 결론부터 제시하고 그 뒤에 해당하는 논리나 근거 제시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이런 흐름을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보고서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요약 페이지는 논리의 흐름을 벗어나, 가외의 장표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다. 일종의 부록이다. 시간이 부족하시면 이것만 보세요. 대신 시간이 좀 더 있다면 자세한 내용은 뒤에 더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2) 보고 방식
① 메일로 보고하는 경우
메일 본문에 요약을 적는다. 보고서는 각자의 구성 양식에 맞추되, 메일에 요약을 쓰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첨부 파일을 열어보시되, 중요한 내용은 5페이지에 있는 xxx 안건에 대한 것입니다."라고 핵심을 적어주는 셈이다.
② 구두로 보고하는 경우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여기서 갈린다. 일 잘하는 사람은 피보고자가 보고자의 논리 흐름대로 보고서를 볼 수 있게끔 종횡무진 그들을 이끈다. 이때 유의할 것이 있다. 아래를 보자.
"상무님 xx 안건 보고 드리겠습니다. 네, 우선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안건은 4페이지 하단에 제시된 xx 부분입니다. 이에 대한 거래처의 반응은 6페이지에 제시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 사내적으로 2페이지 상단의 xx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보이는가? 그야말로 '종횡무진'하고 있다. 말만 보면 번드르르해 보이는데 그 앞의 상무님은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가 앞으로 넘겼다가 복잡하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하고 짜증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i) 보고서 자체의 구성이 올바라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첫 번째 조건이다.
ii) 구두로 피보고자의 논리를 보고자의 논리에 맞추는 것은 아래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사실 그래서 i)이 중요한 것이다.)
"상무님 xx 안건 보고 드리겠습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안건 관련해서, 우선 사내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항목과 그 절차를 살펴보았습니다. 세부내역은 2페이지 상단에 있습니다. 절차에 따라 저희가 처하는 입장을 경우의 수로 따져보면 총 세 가지 선택지가 나오는데 이는 4페이지 하단에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저희가 어떤 입장을 선택할지에 따라 거래처가 보일 반응도 시뮬레이션해 보았으며 이는 6페이지에 기술했습니다."
위와 동일하다. 하지만 순서대로 갔다. 잘 쓴 보고서라면 그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다만 구두 보고 시에 얼마나 skip을 해도 되는지 핵심을 짚어주는 것이며, 이를 구두로 표현할 때 상대방이 수긍하게끔 문맥을 다듬을 뿐이다.
사실 마지막 문단에서 모든 답이 나왔다. 보고서 자체가 잘 된 것이면 요약, (메일, 구두) 보고는 '그저 거들뿐'이다. 그리고 보고서 자체가 잘 되려면 '보는 사람'과 '사안에 걸맞은 구성'의 조합을 잘 해야 한다.
일을 하며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PPT로 보고를 잘한다고 평을 받는 사람을 곰곰이 보라. 그들은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하나의 장표에 ① 어떤 문구를 담아야 핵심을 찌를지 ② 어떤 그래프를 담아야 논리적 보완이 될지 ③ 그 그래프의 가로축과 세로축에 어떤 지표를 넣어야 설명이 쉬운지 고민한다.
대부분 ①과 ②는 잘 고민한다. 하지만 ③까지 고민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는 사람은 적다.
내가 ①, ②, ③을 잘 구성해서 만든 PPT로 발표를 한다면 그저 화면에 보이는 내용을 읽기만 해도 청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다르다. 잘 된 보고서는 순서별 포인트만 짚어줘도 좋은 보고자라 평을 받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잘 된 보고서는 무조건 두괄식으로 쓴 게 아니다. 옷만 TPO가 중요하다 생각하지 말고 보고서에도 TPO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5) 편 예고 + (1) 편 ~ (3) 편 링크
(5) 편 역시 글쓰기에 대한 것이지만, 보고서보다 캐주얼한 글을 사내에서 쓰는 경우를 다뤄보려 한다.
(1) 편
https://brunch.co.kr/@crispwatch/24
(2) 편
https://brunch.co.kr/@crispwatch/43
(3) 편
https://brunch.co.kr/@crispwatch/51